박 대통령·아베 뒤엔 1965년 수교 현장 지켜본 한글 병풍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2일 일본 도쿄 쉐라톤 호텔에서 열린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아베 총리는 축사를 통해 “한·일 수교 50주년의 주제는 함께 여는 새로운 미래”라며 “현재 동북아 정세를 감안하면 한·일 양국의 협력 강화, 또 한·미·일 3개국의 협력 관계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둘도 없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군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도쿄 AP=뉴시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22일 각기 한글로 적힌 6폭짜리 병풍 앞에서 축사를 했다. 1965년 12월 18일 서울에서 한·일 기본관계조약 비준서 교환식을 할 때 놓여 있던 역사 깊은 병풍이다. 교환식 이후 양국은 기념으로 12폭짜리 병풍을 반씩 나눠 가졌다. 병풍엔 조선 선조 때의 문인 송강 정철의 가사 ‘성산별곡(星山別曲)’이 한글로 적혀 있다. 성산별곡의 전반부를 한국이, 후반부는 일본이 각기 대사관에서 보관해왔다.

 박 대통령은 병풍 앞에서 ‘무신불립(無信不立)’이란 네 글자를 꺼냈다. ‘믿음이 없으면 일어설 수 없다’는 뜻이다.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 시절인 2006년 3월 8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총리를 도쿄에서 만나 강조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당시 박 대통령은 “무신불립이라는 말처럼 국가 간에도 신뢰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 무신불립이란 말이 서울과 도쿄(東京)에서 다시 등장했다. 박 대통령은 축사에서 “무신불립이라는 말처럼 양국 국민 간 신뢰를 쌓아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의 축사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도 도쿄 리셉션에서 대독했다. 이날 박 대통령은 “한 사람의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만인의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이 있다. 한·일 양국이 1965년 시작한 화해의 여정을 지속하고, 양 국민들이 새로운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도록, 그 길을 함께 만들어 가길 바란다”며 축사를 마무리했다.

 아베 총리의 축사에도 ‘신뢰’가 주요 키워드로 등장했다. 아베 총리는 “이웃 나라로서 서로 신뢰하면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굳은 믿음이 널리 공유됐다”고 말했다. 양국 정상의 메시지를 관통한 한자는 ‘믿을 신(信)’이었다.

 아베 총리는 축사에 앞서 “국회 결산위원회 심의에 참석해야 했지만 야당의 양해를 얻어 행사에 왔다”며 “이것이야말로 일·한 관계 중요성에 대해 여야가 같은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아베 총리는 자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와 외종조부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기시 전 총리 친동생) 전 총리가 양국 관계에 깊은 관여를 했다고 소개했다. 기시 전 총리는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자민당 파벌 총수로서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을 막후에서 지원했다. 아베 총리는 이날 네 차례에 걸쳐 박수를 받았다. 아베 총리는 윤 장관이 대독한 박근혜 대통령의 축사가 끝난 뒤에 자리를 떠났다.

 아베 총리의 축사에 이어 건배사를 한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는 맥주 잔을 들고 “맥주가 참 맛있어 보인다”며 “이 한 잔으로 여러분의 노고를 한번에 날렸으면 좋겠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모리 전 총리는 지난 1일 박 대통령을 예방해 아베 총리의 친서를 전달했다. 서울에선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 일본어로 ‘건배’를 의미하는 “간빠이(乾杯)”를 외쳤다.

 이날 행사엔 각국의 정계 인사 및 외교사절이 대거 참석했다. 도쿄 리셉션엔 1000여 명이, 서울 리셉션엔 600여 명이 참석했다. 서울 리셉션에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등이 참석했다. 일본 측에선 아베 총리 특사 자격으로 방한한 누카가 후쿠시로(額賀福志郞) 일·한의원연맹 회장, 벳쇼 고로(別所浩郞) 주한 일본대사 등이 참석했다.

 도쿄 리셉션에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상,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 나카타니 겐(中谷元) 방위상,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담화의 주인공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중의원 의장이 나왔다. 아베 총리의 외교 책사로 불리는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국가안전보장국 국장도 자리했다. 캐럴라인 케네디 주일 미국대사와 청융화(程永華) 주일 중국대사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서울 리셉션에 참석한 공로명(전 외무부 장관) 동아시아재단 이사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양국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협력의 필요성을 언급해 훈훈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은 “한·일 양국 정상이 서로의 아픈 데를 찌르지 않고 앞으로 잘 지내자는 내용의 축사를 발표해 아주 ‘평화로운 파티’였다”며 “지난 50년간 주한 일본대사관이 주최한 국교 정상화 행사 중에서 가장 성대했다”고 회고했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서울=전수진·안효성 기자 hwasa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