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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웨이스 “반역 꿈꾸나” … 앞 일 모른 채 장칭에 돌직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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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호 29면

19세 무렵의 쑨웨이스(가운데). 왼쪽은 모친 린루이(任銳). 오른쪽은 경극 배우로 이름을 날린 동갑내기 이모 린쥔(任均). 1938년 옌안. [사진 김명호]

무슨 일이건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없어도 그만이다. 인간은 이유를 만들 줄 아는 동물이다. 문혁 시절 나도는 소문이 있었다. “장칭(江靑·강청)과 예췬(葉群·엽군)이 한 통속이 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수양딸을 죽음으로 몰았다.” 이 소문은 특징이 있었다. 누가 죽었는지, 이유가 뭔지, 그럴 듯하게 대는 사람이 없었다. 총리의 수양딸이 많은 탓도 있었지만, 워낙 구름 위에서 벌어진 일이다 보니 서민들의 상상력은 한계가 있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31>

40년 후 ‘린뱌오(林彪·임표) 장칭 반혁명 사건’ 재판의 전 과정을 지켜본 전 전인대 상무위원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워낙 고령이다 보니 두서가 없었지만 내용은 정확했다. 온갖 자료와 판결문을 내보이며 흥분했다. 사정 상 이름은 생략한다.

“억울한 사람이 속출한 시대였다. 저명한 작가나 예술가도 난세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하다 귀신도 모르게 맞아 죽었다. 쑨웨이스(孫維世·손유세)는 박해 받다 죽은 예술가 중 나이가 제일 어렸다. 마지막도 가장 처참했다. 저우언라이의 수양딸이었던 쑨웨이스는 재기 넘치는 극작가였다. 옌안 제일의 미녀이기도 했지만, 국민당에게 살해당한 중공 원로의 딸이다 보니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과 주더(朱德·주덕), 저우언라이 등 1세대 혁명가들의 품 안에서 성장하다시피 했다. 신중국 성립 초기, 중난하이(中南海)도 자유롭게 출입했다. 고위층의 관심과 신임이 대단했다. 마오쩌둥도 쑨웨이스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다 들어줬다. 하늘과 통하는, 통톈(通天) 인물에게 감히 독수를 뻗칠 사람이 누가 있을지 생각해봐라. 린뱌오와 장칭 외에는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장칭과 예췬이다. 린뱌오는 쑨웨이스의 죽음과 상관이 없다.”

여자들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는 건 신중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멀쩡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별것도 아닌 일로 이를 갈고, 보복이 남자들보다 더 잔인하다. 파고 들어가 보면 원인 제공자가 남자 놈들이다 보니 할 말도 없다. 쑨웨이스의 죽음도 근본 원인은 마오쩌둥과 린뱌오가 싱거운 짓을 했기 때문이다.”

1 문혁 초기의 장칭(가운데)과 린뱌오 부부. 1967년 가을 베이징. 2 마오쩌둥과 한적한 시간을 보내는 장칭. 1950년대 말, 베이징 교외. [사진 김명호]

1927년 4월,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공산당 숙청이 시작됐다. 저우언라이가 이끌던 상하이의 중공 지하당은 희생된 당 고위층의 어린 딸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심했다. 가명으로 문화단체에 입단시키는 것이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상하이에는 진보를 표방하는 예술단체들이 많았다. 중공이 침투하기에는 적격이었다.

지하당은 쑨웨이스를 리린(李琳·이림)이라는 가명으로 동방화극사(東方話劇社)에 입단시켰다. 리린은 함께 들어온 열네 명 중 용모가 뛰어나고 연기에도 소질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연출에도 관심이 많았다. 러시아 문호 고골리의 작품을 줄줄 외다시피 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동방화극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아동 연극단체였다. 수시로 유명학자와 연기자, 연출가들을 초청해 어린 연기자, 예동(藝童)들을 교육시켰다. 하루는 젊은 여자 연기자가 강단에 섰다. 예동들은 깜짝 놀랐다. 며칠 전 단체로 관람했던 고골리의 작품에 목수의 부인으로 등장했던 바로 그 배우였다.

강의를 마친 여배우는 자신의 서명이 담긴 사진을 예동들에게 나눠줬다. ‘란핑(藍苹)’ 두 자가 선명했다. 사과(苹果)를 좋아하던 장칭이 ‘란빈(藍蘋)’보다 먼저 사용한 예명이었다. 강의실을 나가던 란핑은 앳된 여자애의 질문에 걸음을 멈췄다. “빨간 사과와 파란 사과 외에는 본 적이 없습니다. 남색 사과는 말도 안됩니다.”

란핑은 웃었다. “그저 예명일 뿐이다. 아무 의미가 없다. 듣기만 좋으면 된다.” 리린도 지지 않았다. “듣기만 좋으면 된다니. 반역을 꿈꾸는 사람은 듣기 좋은 소리만 한다던데, 선생님도 그런가요?”

1950년대 말, 쑨웨이스는 후르쇼프의 부인에게 어린 시절 느꼈던 장칭의 첫 인상을 말한 적이 있다. “머리가 단정하고 눈빛이 영롱했다. 코 끝에서 입술까지의 곡선은 예쁘다 못해 신기가 감돌았다. 웃을 때는 청춘의 활력이 넘쳤다.” 여자가 여자를 평하다 보니 트집도 빠지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이빨 하나가 누런 색이라 이상했다. 나머지가 백설 같다 보니 더 두드러지고 보기에 흉했다. 조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1937년 봄, 소녀 티를 벗기 시작한 리린은 란핑과 같은 영화사에서 일했다. 란핑은 리린을 피했다. 그 해 겨울 리린은 동생과 함께 아버지 친구들이 즐비한 옌안으로 갔다. 본명도 되찾았다. 옌안의 중공 지도자들은 활달한 쑨웨이스를 좋아했다. 가는 곳마다 웃음을 몰고 다녔다.

쑨웨이스는 마오쩌둥의 숙소에도 자주 갔다. 문이 열려 있어도 그냥 들어가지는 않았다. 경호원과 얘기를 나누면 안에 있던 마오가 밖에 대고 소리쳤다. “이거 웨이스 목소리 아니냐? 들어오지 않고 뭐하냐.” “일에 방해가 될까 봐 그럽니다.” “내가 너를 방해할 테니 염려 마라.”

이듬해 8월, 란핑이 옌안에 오자 상황이 급변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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