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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공급 방식 바꾼 미디어계 거물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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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블로그를 뉴스 매체로 진화시켜…환경·평화 등 다양한 사회운동 주도

아리아나 허핑턴 편집국장. [사진 중앙포토]

미국의 자유 계열 인터넷 블로그 신문인 ‘허핑턴 포스트(The Huffington Post)’를 운영하는 아리아나 허핑턴(65)이 지난 5월 미국 경제 잡지 포브스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순위 61위를 차지했다. 앙겔라 메르켈 같은 국가원수와 수조원의 재산을 가진 부자들 틈새에서 정치인도, 부호도 아닌 그가 이 정도 순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그가 가진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이미 2009년 포브스가 처음으로 선정한 ‘미디어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2위에 올랐다. 영국 신문 가디언의 ‘미디어 인물 100명’ 리스트에서 4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2011년 AOL이 허핑턴 포스트를 3억1500만 달러에 매입했다. 이로써 자금난 걱정 없이 허핑턴 포스트를 운영하고 있다.

허핑턴은 2005년 5월 허핑턴 포스트를 공동 창간해 지금까 지 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허핑턴 포스트는 화제를 몰고 다니는 경이로운 미디어다.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유명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칼럼니스트가 집필하는 블로그를 바탕으로 미디어를 구성한다는 혁신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했다. 정치, 미디어, 비즈니스, 엔터테인먼트, 생활, 환경 운동, 세계 뉴스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종합신문의 오피니언 난이나 심층 기사를 읽는 느낌이 든다. 한마디로 오프라인 신문보다 수준이 더 높은 인터넷 매체로 평가 받는다.

오프라인 신문보다 수준 높은 인터넷 매체
현재 미국판 외에 영국·캐나다·마그레브 판은 허핑턴 포스트가 직접 운영하고 있다.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독일판 등은 현지 언론사와 제휴해서 운영하고 있다. 2011년 말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와 손잡고 프랑스어판 서비스 ‘르 허핑턴 포스트’를 창간한 것이 한 예다. 일본에선 2013년 5월 7일 아사히신문과 손을 잡고 일본어판인 ‘허핑턴 포스트 재팬’을 운영 중이다. 한국에선 2014년 초 한겨레와 합작법인 ‘허핑턴 포스트 코리아’를 세워 한국어판 서비스를 하고 있다.

올해로 창간 10주년을 맡는 허핑턴 포스트는 허핑턴의 적절한 전략으로 짧은 시간 안에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터넷 매체로 자리 잡았다. 허핑턴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지명도를 적절히 활용했다. 정치칼럼니스트, 라디오 출연자에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경력과 13권의 책을 쓴 저술가로서의 명성을 십분 활용해 훌륭하거나 이름 있는 필자를 허핑턴포스트에 끌어들였다. 그는 인터넷을 적극 활용해 자금과 독자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인터넷의 영향력을 미디어와 정치적 목소리로 활용하는 데 큰 재능을 보였다. 그가 끌어들인 대표적인 인물이 미국의 저명 역사학자이자 정치칼럼니스트이며 사회비평가인 아서 슐레진저 주니어다. 슐레진저는 케네디 행정부에서도 일했던 노정객으로 블로그 스타일의 허핑턴포스트에 맞지 않는 인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허핑턴은 슐레진저의 글을 팩스로 받아 이를 블로그에 올렸다. 블로그와 어울리지는 않지만 중후한 글을 쓰는 통찰력 있는 인물의 글을 받아 올림으로써 허핑턴 포스트를 다른 인터넷 매체와 차별화하는 고급 미디어로 만든 것이다. 2005년 허핑턴 포스트에 처음 글을 쓴 슐레진저는 2007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허핑턴 포스트를 수준 높은 인터넷 매체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면서 허핑턴은 허핑턴 포스트를 일반 매체와 차별화하는 데 주력했다. 블로그를 뉴스 매체로 진화시킨 것이 그 하나다. 기존의 폐쇄적인 블로그를 개방적이고 쌍방 소통형으로 바꾸면서 뉴스 매체의 하나로 자리잡게 했다. 일반 매체와도 다르고, 기존 블로그와도 다른 차별화된 매체 특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허핑턴 포스트만의 정체성이다. 창조적인 생각을 가진 250여명의 블로그 필진으로 시작한 허핑턴 포스트는 다양한 분야에서 일반인이나 기자들이 모르는 특수한 뉴스를 생산하고 이를 일반인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기존의 뉴스 공급 방식을 바꾸는 혁신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면서 의견을 하나의 뉴스로 만드는 독특한 매체 특성을 띠기 시작했다. 허핑턴 포스트 스타일의 뉴미디어다.

저술가로도 유명

일반 매체와 다르고 블로그와도 차별화된 허핑턴 포스트. [사진 중앙포토]

인터넷 미디어, 블로그 미디어라는 허핑턴 포스트의 특징은 저비용 고원고료 시대를 가능하게 했다. 기존의 매체는 경상비가 많이 들어 필자에게 충분한 원고료를 지급하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하지만, 허핑턴 포스트는 인터넷 서버 운용과 편집 비용을 제외하고는 들어갈 비용이 거의 없었다. 이에 따라 광고 수입을 대부분 원고료로 사용할 수가 있었다. 이에 따라 충분한 원고료를 지급할 수 있었다. 글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매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갈수록 더 좋은 필진, 더 좋은 글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필자들은 원고료 수입 외에 독자들이 다는 댓글과 여기에 대한 인터랙티브한 대응을 즐길 수 있다. 쌍방형 매체가 가능해진 것이다.

허핑턴은 그리스계 미국인이다. 지금 이름을 보면 잘 알 수 없지만 본명은 아리아나 스타시노풀로스다. 그리스 정교 신자다. 1950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기자 출신의 관리 컨설턴트였던 아버지 콘스탄티노스와 어머니 엘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16세때 영국으로 이주했으며 케임브리지대 거튼 칼리지를 다녔다. 케임브리지에서 그는 외국인으로는 처음, 여성으로는 세 번째로 케임브리지 학생회 회장을 맡았다. 이미 젊어서부터 걸물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영국 BBC방송에서 방영하던 ‘페이스 더 뮤직’이라는 이름의 음악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는 진행자인 버나드 개빈과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영국 전역의 음악축제 현장을 포함해 여러 나라를 돌며 사랑을 나눴다. 유명 진행자이자 지식인인 개빈은 허핑턴이 쓴 책의 편집을 도와줬다. 개빈을 사랑했던 그는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자유주의자인 개빈은 결혼도, 아이도 원치 않았다. 결국 둘의 관계는 끝났다. 1980년 30세가 된 허핑턴은 영국을 떠나 미국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다.

허핑턴은 23세이던 1973년 스타시노풀로스라는 성으로[여성인 여자(The Female Woman)]라는 책을 펴냈다. 여성 해방운동 전반을 매섭게 공격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유명한 급진좌파 여성해방운동가였던 저메인 그리어(76)를 공격했다. 당시 그리어는 여성해방운동의 주류였다. 그리어는 1970년에 펴낸 [여자 내시]라는 책에서 ‘전통적으로 교외에 거주하며 소비를 즐기는 핵가족이 여성을 성적으로 억압하고 활력을 뺏어가며 여성들을 내시화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자각을 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다. 즉, 이런 환경 속에서 여자들은 자신들의 리비도, 욕망을 갖는 능력, 성적 관심으로부터 격리되고 거세당한 짐승처럼 스스로 성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소비는 섹스에 대한 욕망을 분산시키며, 핵가족은 아기를 키우기에 힘든 환경을 제공해 섹스와 출산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이다. 그리어는 “여자의 몸 구조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브래지어라는 것에 유방을 집어 넣어야 하는 세상에서는 어쨌든 자유란 건 존재할 수 없다”는 말로 유명해졌다. 허핑턴은 이와 반대의 입장에 섰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여성 해방운동가들은 전체적인 여성해방이 모든 여성의 삶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실은 강한 레즈비언 경향을 가진 여성들의 삶만 바꿔놓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보수주의적인 여성운동 입장에서 좌파적인 여성운동을 공격한 것이다.

미국으로 옮긴 허핑턴은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보수적인 뉴스와 해설, 그리고 오피니언을 다루면서 가장 널리 읽히고 영향력이 있는 잡지이자 웹사이트’를 자처하는 내셔널 리뷰에 글을 기고하면서 보수 논객으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1981년에는 유명한 그리스계 미국인 소프라노인 마리아 칼라스의 삶을 다룬 [마리아 칼라스-전설 뒤에 있는 여인]이라는 전기를 썼다. 1989년에는 세계적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삶을 다룬 [피카소-창조자이자 파괴자]라는 전기를 내놨다.

보수주의자→자유주의자로 변신
1993~95년 캘리포니아 연방하원의원을 지낸 마이클 허핑턴과 1986년에 결혼해 1997년까지 살았다. 그때 얻은 성이 허핑턴이다. 1986년 결혼 직후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로 이주했다. 남편 마이클이 이 지역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연방하원의원으로 출마하기 위해서였다. 1992년 선거에서 마이클은 상당한 표차로 승리했다. 그 뒤 1990년 허핑턴은 미국 시민으로 귀화했다. 귀화가 늦은 편이다.

1994년 남편 마이클은 캘리포니아주 연방상원의원에 출마했으나 민주당 거물 정치인인 다이앤 파이스타인과 접전 끝에 박빙으로 낙선했다. 허핑턴은 당시 남편의 상원의원 유세를 지원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 인사가 됐다. 이를 계기로 그는 뉴트깅리치나 밥 돌 같은 공화당 정치인의 신뢰할 만한 조언자로 활동하게 됐다. 명석하고 연설을 잘하며 지혜로운 아이디어가 샘솟는 이 여성은 미국 정계의 주요 인사로 부상했다. 깅리치가 연방하원 야당 원내총무로서 ‘공화당 혁명’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대승을 거둔 1994년 중간 선거를 지원했다.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밥 돌을 지지하기도 했다. 남편이 소속한 공화당을 적극 지원한 것이다.

하지만 남편 마이클이 문제를 일으켰다. 1998년 마이클은 자신이 양성애자임을 고백한 뒤 정치를 접고 성적소수자 권리 옹호운동에 뛰어들었다. 마이클은 이미 자신이 1995년 여자는 물론 남자와도 데이트를 했다고 처에게 고백했다고 밝혔다. 부인은 이를 별문제 삼지 않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남편의 고백은 부부 사이에 금이 가는 결과를 빚었다. 두 사람은 1997년 이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명의 딸이 있다.

허핑턴은 허핑턴 포스트를 하기 전까지 미국의 인기 있는 보수 방송인으로 활동했다. 1990년대 라디오 등에 출연해 보수주의 입장에서 정부에 따끔한 한 마디를 날렸다. 하지만, 그는 1990년대를 지나면서 점차 자유주의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허핑턴은 2000년 유고슬라비아(코소보) 전쟁 당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세르비아 폭격에 반대했다. 그러다 2003년 무소속으로 캘리포니아주 주지사 선거에 나섰다. 허핑턴은 당시 대결을 ‘하이브리드 대 험머’라고 표현했다. 자신은 친환경 자동차인 도요타 프리우스를 모는 반면 상대인 공화당의 아널드 슈워제네거 후보는 연료가 많이 드는 험머(무거운 군용 험비를 민간용으로 개조한 차량)를 몰고 다니는 것에 빗댄 표현이다. 허핑턴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선거에선 졌지만 허핑턴은 전국적인 유명 인사가 됐다. 이번에는 남편의 보조가 아닌 자신의 주체적인 모습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2000년 이후 허핑턴은 환경운동단체인 ‘디트로이트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디트로이트 포르젝트’는 환경보존을 위해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대체 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를 개발하도록 압력을 넣는 공공 이익집단이다. 2003년 대대적인 모금으로 방송광고를 하면서 주장을 널리 알렸다. 미래를 내다보고 친환경 자동차 개발을 주창한 그의 업적은 지금도 널리 칭송된다. 2004년에는 민주당의 존 케리 후보를 지지하며 선거운동을 지원했다. 민주당 전국 대회에 참석하는 등 민주당과 가까운 진보인사로 이미지를 변신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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