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병 진료 한 해 11만5000명 … 불공정 줄여야 위험사회 예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2년 전 부산의 한 사립대를 졸업한 최모(26·여)씨는 회사 수십 곳에 입사 지원을 했지만 모두 탈락했다. 지난해 서울로 올라온 최씨에게 한 온라인 쇼핑몰에서 피팅모델로 일해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한 달에 200만원 정도 벌 수 있다”는 말에 일을 시작했지만 월급은 제때 나오지 않았다. 쇼핑몰 사장은 항의하는 최씨에게 상습적으로 폭언을 하기도 했다. 이후 우울증에 시달리던 최씨는 자기도 모르게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짜증을 내는 일이 잦아졌다. 편의점 직원, 택시 기사 등 모르는 사람에게 별 것 아닌 일로 화를 내기도 했다. 결국 상담을 위해 정신과를 찾은 최씨는 ‘화병’ 진단을 받았다.

 한국 사회에 분노가 만연해 있다. 축적된 분노가 질병으로 번지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화병으로 진료받은 환자의 수는 연평균(2011~2013년) 11만5000명에 달한다. 미국 정신의학회는 1995년 이 병을 ‘한국민속증후군’이라 분류하고 질병 분류표에 ‘Hwa-byung(화병·火病)’으로 정식 표기하기도 했다.

 실제 블로그·트위터상의 빅데이터(2008년 1월 1일~2015년 6월 9일)를 분석해보면 한국인들은 일상 생활에서 분노를 느끼고 표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분노’와 관련된 감성 연관어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표현은 ‘싫다’(71%)였다. ‘짜증 나다’(12%), ‘화나다’(8%), ‘기분 나쁘다’(4%), ‘열 받다’(3%), ‘분노하다’(2%)가 뒤를 이었다.

‘싫다’의 대상은 ‘집’(9만9241건), ‘친구’(7만6515건), ‘학교’(4만9881건), ‘공부’(3만2307건) 등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상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분노의 대상으로 ‘엄마’(8만2218건)가 두드러졌다. 고려대 한성열(심리학)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엄마는 자녀의 모든 것을 받아주는 가장 밀접한 관계”라며 “자녀의 분노는 물론 온갖 감정의 표출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본지가 성인 남녀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도 한국인의 마음속에 분노가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응답자의 22.3%가 ‘하루에 5번 이상’ 분노를 느낀다고 답했다. ‘일주일에 3번 이상’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26.9%에 달했다. ‘하루에 1번’이란 응답은 26.4%였다.

 전문가들은 “특정 사회에 분노의 감정이 만연하면 범죄율이 치솟는 등 ‘위험 사회’로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연세대 류석춘(사회학) 교수는 “사회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국민이 분노에 휩싸일 경우 각종 범죄나 갈등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높다”며 “공정한 경쟁의 룰을 정착시키고 불합리한 차별을 바로잡아 ‘집단분노’부터 해소하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전남대 국민호(사회학) 교수는 “오로지 성공과 경쟁을 향해 내달리는 사회에선 분노를 조절하는 ‘사회적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며 “경쟁과 다툼이 일상화된 사회 분위기를 개선하고 소통과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정강현(팀장)·유성운·채윤경·손국희·조혜경·윤정민 기자 fone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