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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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미국의 문예평논지 「아틀랜틱 먼들리」의 1886년 11월호에는 『한국의 혁명』(A Korean Coup d' tat)이란 글이 실려 있다.
미국인이 쓴 최초의 「갑신정변논」이다.
필자는 미국인「퍼시벌·로웰」. 그 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5일 아침 서울 시민은 눈을 뜨자 새 정부의 아래 있었다. 이 새 정부는 홍영식을 명목상의 수반인 영의정으로 추대하고 있었다. 보수파는 거의 전각요가 암살되고 진보파가 그 자리를 메웠다. 그것은 난폭한 내각 개편이였다. 그때까지는 이게 일어난 사건의 전부였다. 그러나 분쟁은 이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인이었지만 이 땅에서 일어난 역사의 현장을 보고 적잖게 동정적이었다.
우정국의 낙성식 축하연이 있던 1884년 12월4일 저녁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삼일천하」에 그치고 궁극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개화당정권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으나 그 중요성은 1백년이 지난 오늘 새삼 강조된다. 그 정변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인 근대국가 확립을 위한 과감한 자주운동이었고, 그 정부가 최초의 근대적 성격을 가진 민족주의 정부였기 때문이다.
그 정부의 개혁정강만 봐도 그들의 기백과 근대화의지가 너무 뚜렷하다.
중국에 대한 조공폐지, 양반신분제도와 문벌폐지, 인재등용, 내각제도수립, 군사제도개혁, 재정, 경제개혁, 근대경찰과 행형실시등이다.
그 혁명의 실패는 직접적으론 청군의 군사적공격과 그에대한 개화당지지 일군의 철병으로 기인했다.
그러나 근본원인은 그들의 개화사상이 사회에 보급되지 못하고 민중의 지지가 없었으며 동지도 적었던데 있다.
개화당의 요인으로 정변당시 병조참판이었던 서재필의 회고도 인상적이다.
『이태조와 왕씨의 혁명, 그리고 3국 사이의 전쟁은 일종의 정권쟁탈전이였다. 그것이 민중의 경제적, 사회적 복지를 위한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신정변은 압박받는 민중들의 분기로 된것이 아니고 당시 특권계급의 몇몇 청년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김옥균, 박영효등 소수 개화당 지식인들은 민중의 기반이 없는 혁명에 실패했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내 민족, 내 나라를 찾아 「인민평등」의 이상을 실현할 근대적 국민국가를 세우려던 선구적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1백년이 지난 오늘, 실패한 갑신정변은 상황극복의 지혜로 새로와 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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