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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한국교회의 갱신은 그 역사의식의 혁신으로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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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 글은 국제기독학생연합회 (ICSA) 가 펴내는 CR (씨알) 시리즈 3호 입니다. CR시리즈는 오늘의 기독교가 처한 제반문제를 깊이 성찰하고 교회 (Church) 의 갱신과 화해 (Reformation & Reconciliation) 를 위한 기독청년들의 진지한 뜻을 발표하는 장입니다. 한국교회가 주님과 겨레앞에 바로 설때까지 CR의 행진은 계속될 것입니다.

<열린 교회와 복음의 새로운 지평>
오늘의 기독교는 수십, 수백갈래로 분열되어 그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기독교는 도대체 어떤 종교인가? 그 본질은 무엇인가? 각 교회는 나름대로의 대답이 있고 신조와 교리 및 신학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계속 분열과 파당에 시달려왔고, 지금은 온갖 신학사상이 백가쟁명의 형국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천년을 전횡해오던 교황 절대 무오주의의 가톨릭 독주시대가 15∼16기 개혁자들의 도전에 의하여 성서절대 무오주의로 전환된 이래 성서를 절대시 하는 것이 대다수 교회의 공통된 입장이면서도 성서를 해석하는 견해차로 인하여 각 교회는 서로 다른 신학이론을 배타적으로 고집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자기교파 교회의 교리에만 집착하다보니 자기와는 다른 교리와 신학에 대하여 열린 자세로 대화·이해·수용하기보다는 폐쇄적·배타적으로 적대시하고 다루며 이단정죄로 치달아 자기 교파신학만 수호하기에 급급한 것이 저간의 사정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신학적 견해와는 상관없이 교회지도층 상호간의 이해관계로 빚어지는 부끄러운 교파분열과 교회의 부패가 가중되어 오늘의 기독교는 안팎으로 그 정체성을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되어있는 것이다. 부패한 교계의 지도층간의 교권욕과 이해상반으로 빚어지는 교회의 분열이나 정체성의 위기는 본원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해석상의 차이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기독교의 신학적인 정체성 위기에 관하여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기독교의 본질을 확인하여 비록 상이한 신학노선을 택하고 있더라도 교회상호간에 배타·질시·이단정죄하던 저간의 교계의 풍토를 쇄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교회는 한나무에 뻗어오른 가지들과 같음을 인식하고 서로간에 열린 자세로 화해하고 협력하는 섭리의 동역자들로서 겨레와 세계앞에 그 책임을 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서해석」으로서의 신학이 왜 그처럼 다양하고 상이하게 전개되느냐하는 근본문제부터 언급하는 것이 순서라고 본다.
성서는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고 사탄을 굴복시키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한 비밀의 말씀 (계시)이 간직되어 있는 암호책과도 같다. 곧 성경은 인봉된 수수께끼 (enigma) 와 같은 비밀의 말씀인 것이다. 따라서 성서에는 사탄을 괴멸시키고 인류를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필요한 주요내용들이 대부분 비유와 상징으로 계시되어 있는 것이다 (마13:34∼35, 요16:25)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인 이사야는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하면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사29:11∼l2)고 하여유식자, 무식자 할 것 없이 성경에는 다같이 장님과 같으므로 함부로 해석할 수 없다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또한 다니엘12장4절에는 「마지막때까지 이말을 간수하고 이글을 봉함하라」고 전하고 있으며 또한 예수께서도 비유가 아니고는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았다고 했으며(마13:34∼35), 「지금까지는 내가 비유로 말했으나 더 이상 비유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한 것을 밝히 일러 줄때가 올 것이다」(요16:25)라고도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하나님의 비밀」「그리스도의 비밀」「하나님이 감추인 계획과 뜻」에 관한 많은 기록이 여러곳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마4:11, 마13:10∼17, 눅8:9∼10, 마24:32∼37, 고전4:l,엡1:9, 3:3∼9, 6:9, 골1:26∼27, 2:2, 4:4, 계10:7).
그러면 왜 성서에는 이와 같이 중요한 내용들이 비밀스럽게 인봉되어 암호와도 같이 함부로 알수 없는 비기처럼 전해져 내려오는가? 그것은 때가 이를 때까지는 하나님의 비밀 즉 사탄을 괴멸시키고 인류를 해방하기 위한 천기를 공공연하게 문자대로 드러낸다면 이 비밀은 악한 사탄에 의하여 역이용 당함으로써 하나님의 성리와 그 소명받은 일꾼들을 파멸케 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선한 하나님 나라가 아닌 사탄마귀가 통치하는 죄악세계이다(고후4:4) . 그러므로 성서에는 끝날에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완성시키러 오시는 재림예수가 오실때 이 세상의 임금인 사탄이 쫓겨난다(요12:31)고 기록되어 있다.
그때가 되기 전까지는 소수의 하나님의 사자들은 언제나 이 죄악세계에서 몰리고 쫓기면서도 하나님의 비밀을 사탄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간수하고 봉하여 전해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때가 이를때까지 (단12:2, 계10:7, 계22:10)성서를 암호로 인봉하여 기록한 이유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섭리의 중심인물들은 그 비밀을 깨달아 하나님의 일을 행해오고 사탄세계의 악한 인간들은 이해할 수 없도록 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가로막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암3:7, 마13:10∼l7, 마24:32∼3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뜻을 모르고 성서를 함부로 분자대로 해석하거나 억지로 풀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게 됨(벧후3:16)을 알아야 한다. 어떠한 인간적인 지식이나 학문적 연구만으로 성서를 온전히 해석해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암호로 성서를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이나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통하여 해명하지 않고서는 그 모든 판독이 온전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도 예수가 재림할때가 되지 않고서는 우리가 성서의 온전한 뜻을 알수 없다고 했으며 (고전13:9∼11), 또한 고린도전서 4:5에는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는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고 한 것이 아닌가?
이것은 복음이 역사의 종말을 향하여 닫혀있는 메시지가 아니라 주의 재림과 더불어 전개될 새로운 역사의 미래를 향하여 열려있는 메시지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주의 재림은 복음의 새로운 지평을 트이게 할 역사적인 전환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교회들이 금과 옥조로 내세우는 성서해석 이론인 교리나 신조나 신학체계를 맹신하면서 자기교파와는 다른 성서해석에 대해서 무조건 닫힌 마음으로 적대하거나 배타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가 믿는 것, 자기가 성서를 이렇다고 해석하는 것 이외에는 무조건 배타적으로 대하는 자세야말로 신앙인에게는 가장 무서운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의 모든 교회는 상호간에 열린 자세로 서로 배우고 이해하고 협력하여 주님이 다시 오실때까지 겸허하게 성서를 읽고 진리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성서를 보는 눈- 거시적·미시적 시각>
그런데 지금까지 성서에 관한 신학자들의 연구결과는 그 견해가 양극화되어 있다. 곧 축자영감설을 따르는 근본주의 계열에서는 성서의 모든 말씀을 하나님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으로서 (딤후3:6)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며 문자주의적인 이해를 위주로 하고 있다. 이들은 매사에 보수주의적인 자세로 임하여 초자연적인 신관과 기독론을 고수하면서 역사속에서 기독교는 무엇을 책임지고 실천할 것인가 에는 등한하고 오로지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를 대속받고 현세에는 복받고 살고 내세에 천당가는 것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어있다. 개인 구원과 성령운동에 보다 치중하는 경향이 짙은 것이다. 그들은 성서해석의 개방성을 부정함으로써 극단적인 폐쇄성에 붙잡힌 집단으로 굳어져 교회분열의 온상으로 화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회들은 90%이상이 이와 같은 체질을 가진 보수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성서비평학을 도입하여 성서의 내용이나 저작자, 자료, 편집양식, 본문 등에 관하여 비판적으로 연구 검토하는 입장을 취하는 자유주의계열에 서있는 사람들이 있다. 자유주의적 성서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들의 자세가 현실참여와 사회구원에 치중하며 진보주의적인 성향을 띠는 수가 많다. 이들은 성서를 인간의 지식과 학문으로 해명하려는 입장에 서게되어 때때로 하나님의 계시인 신언으로서의 성서의 권위와 신령한 오의를 훼손케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양극화된 어느 한쪽만의 입장이나 시각만으로는 성서의 전체적인 의미를 온전하게 밝혀낼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성서는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기록되어 있는 자구는 물론 일점일획까지라도 성서의 기자들이 성령에 사로 잡혀서 구원섭리에 관한 것 이외의 역사, 문화, 윤리, 자연, 과학 등에 관한 것까지도 모조리 완전 무결하게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얼마든지 성서 자체속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창세기6:19∼20과 7:3∼5를 대조해 보라. 요한복음 2장의 성전청결과 공관복음서의 그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냐 말기냐의 문제로 엇갈리고 있으며 또한 마태와 누가가 같이 기록한 예수의 족보도 상위점이 나타난다.)
또한 신약성서의 대표적인 기자인 바울은 자기가 성령이나 주님의 지시대로 기계적으로 모든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놓고 있는 것이다 (롬3:5 고전7:25 고후11:17등) . 또한 우리는 성서비평학을 도입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성서를 자칫 인간의 지식과 학문의 대상으로 전락시킴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이고 신령적인 측면을 소홀히 하여 기독교를 단순한 사회 과학적인 이데올로기로 변질시키는 약점을 안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이 시점이야말로 보수근본주의자들의 편협성, 독단성, 타계주의, 비현실성을 넘어서고 자유진보주의자들의 신령감 결여와 신앙의 이데올로기화를 극복하여 새로운 통합적인 시각 (Uninified Perspective) 으로 성서를 바르고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화해와 대 통일의 신학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임을 강조하는 바이며, 이와 같은 신학은 종말론적 메시아니즘에 입각한 통전적시각으로 성서를 볼 때에라야 제시될 수 있음을 천명하는 바이다.
종말론적 메시아니즘의 통전적인 눈으로 성서를 보면 보수와 진보,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신령과 진리, 비유와 문자, 축자영감과 목적영감이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하여 하나로 수렴되고 화해 되어 새로운 차원으로 통일되고 정서의 온전한 의미를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서는 역사서나 문화사, 과학이론서나 윤리교과서가 아니다. 성서는 원죄를 범하고 타락하여 사탄의 주관을 받고있는 죄악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이 간직되어 있는 책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를 구원섭리의 기본원칙과 내용을 중심하여 거시적인 안목으로 그 전체 줄거리를 먼저 파악한 후에 부분적인 미시적 방법론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처음부터 성서의 모든 기록을 자자구구 축자영감설에 매달려 미시적으로 해석하다가는 성서의 본원적인 줄거리와는 상관없는 지엽말단적이고 부분적인 문체에 붙들려 미로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섭리의 근본원칙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바, 구원이란 인류가 타락이전의 창조본연의 인간과 세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메시아로 강림하시어 십자가에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여 기독교를 세워놓고 역사의 종말에 다시 재림하시는 것도 인류를 타락 이전 창조본연의 상태로 복귀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이것이 구원섭리이니 구원섭리는 곧 복귀섭리인 것이다 (행1:6, 3:21, 26:18, 마17:11) 즉 성서의 근본줄거리는 창조→타락→구원 (복귀) 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의 창조의 원리, 그 창조목적과 이상, 창조본연의 인간과 세계의 내용을 밝히고, 원죄를 범하고 타락한 내용을 분명히 천명하여 원죄는 무엇이며 사탄의 정체는 무엇인가를 해명함으로써 인간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며 구원섭리의 종결 곧 역사의 종말은 어떻게 올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병든 인간 (타락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은 병들기 이전의 건강했던 본래적 인간 (창조본연의 인간)의 모습과 상태를 알고 병의 원인 (타락의 내용) 을 밝혀내면 건강회복 (완전구원) 의 길은 열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고장난 기계를 수리할때도 먼저 완제품의 설계도나 청사진을 알아야만 어디가 잘못되었는가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낼 수 있는 것처럼 타락인간과 죄악세계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데는 신이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신 청사진과도 같은 그의 창조목적을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이 내용에 관해서는 CR2호 「누가 예수를 죽기위해 왔다고 가르치는가」를 참조하기 바람)
그런데 오늘날까지의 기독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칙과 창조목적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성서해석에 있어서도 일지관지하는 공식적이고 원칙적인 해명을 할 수 없었고 그때 그때마다 공식적이고 미봉책인 땜쟁이식 성서해석으로 우왕좌왕해 왔던 실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구원섭리의 완성기에 도래할 종말에 관하여도 초자연적이고 미신화된 환상적인 문자주의 해석으로 인하여 크리스찬들에게 위협적인 공포분위기의 사로잡히도록 함으로써 망상적인 역사의식과 구원관에 빠져 교회가 우민의 집단으로 전락 되어가는 것이다.
역사현실과 사회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신의 구원섭리의 청사진을 교회가 입증해 내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성서문자의 노예가 되어 우민신학의 백일몽에 시달리는 비현실적인 역사이해만을 강조하는 한에 있어서는 교회의 우민화현상은 막을 수 없을 것이며 갈수록 기독교는 미신화될 소지를 안고있는 것이다.

<문자주의 종말론의 미몽에서 깨어나라>
기독교가 제시하는 역사의식(역사관) 의 결론은 「종말론」이다. 끝날 곧 역사의 종말에 관한 예언과 비유의 말씀은 성서가 말하고 있는 결론인 동시에 구원섭리의 완성을 위한 디데이 (D-Day)에 해당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얼마나 많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기록이 「그날」즉 주님이 재림하실 종말의 대심판에 관계된 내용인가.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신약성서 260개장에서 318구절이 예수의 재림에 관한 기록인데 이것은 신약의 25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에 있어서 주의 재림과 종말이 없는 신앙은 역사의 목적이나 결론이 없는 순환사관으로의 후퇴요 기독교 역사의식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성서는 너무도 분명히 역사의 종말과 주의 재림에 관한 기록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으므로 모든 교회는 주의 재림의 날과 역사의 종말에 관한 성서해석을 주요한 교리로 삼고 있는 동시에 전 크리스찬들에게는 큰 희망과 기대의 날로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서가 말하고 있는 주요한 내용중의 결론이 되는 부분이 바로 주의 재림과 종말이므로 상징과 비유의 계시 언어로 기록되어 이것을 문자대로 해석하다가는 큰 실수를 범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후3:6)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다수의 한국교회들은 축자영감주의의 문자주의적인 재림론과 종말론을 영구불변의 교리로서 채택함으로써 수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기독교가 미신화되어 기복신앙으로 변질되고, 비현실적인 망상으로 기울어진 백일몽에 시달리는 우민집단화한 원인이다.
그리하여 미신적인 크리스찬들이 날로 늘어가는가 하면 소위 맑시스트들을 비롯한 유물사상가들의 맹공을 당하고도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우리가 CR2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예정론 교리가 기독교 우민정책의 제1호라면 문자주의 종말론 교리는 그 2호에 해당된다. 주의 재림의 때에 빚어질 종말 현상을 지금까지의 교회가 문자 위주로 해석하고 있는 내용들을 일일이 다 해명하려면 많은 지면이 소요되므로 가장 대표적인 것만 몇가지 언급함으로써 오늘의 교회가 얼마나 우민화하고 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때야말로 교회가 성서의 본질적 의미에서 밝혀진 올바른 「종말론」을 가짐으로서 바른 역사의식과 주님의 재림을 위한 교회 본질의 사명감을 감당해야 할 때가 임박했음을 알리려는 예언자적 소명을 느끼는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먼저 한국교회의 90%에 가까운 보수근본주의 신학의 종말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성서무오주의와 축자영감설에 입각하여 문자 위주의 성서해석에 중독된 사람들로서 말세에 육신을 가진 역사적 나사렛 예수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재림할(마24:30, 마26:64, 살전4:16, 행1:11, 계1:7등)것을 신봉하면서 그와 같은 주의 재림이 있을 때는 전 우주에 천변지이가 종말의 징조로 벌어진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곧 하늘과 땅이 불로써 멸망을 당하고 (벧후3:12)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룬다 (벧후3:13, 계21:1)는 것이며 죽은자들의 시체가 살아서 일어나며 (부활한다) (살전4:16)지상 성도들이 이끌려 올리워져 공중에서 재림하는 주를 영접하고 (살전4:16)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진다(마24:29) 는 것 등이다. 이런 초자연적인 천변지이와 더불어 구름을 탄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영광가운데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강림하게 되고 믿는 사람과 불신자들을 면양과 산양처림 우좌로 갈라세워 심판을 하고 주를 믿다가 죽은 성도들은 무덤에서 그 시체가 부활하여 심판때에 주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구원받은 자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파멸될 이 지구와 태양계를 중심한 우주를 떠나 새로운 하늘과 땅으로 옮겨가서 산채로 영원히 죽지 않고 복락을 누리며 살게되고 구원 받지 못할 자들은 영원한 지옥의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실로 무시무시한 우주와 역사의 대파국으로서의 종말이 아닐 수 없다. 교회의 설교자들은 이와 같은 교리를 천수백년 전부터 계속하여 교인들에게 주입시켜 왔다. 크리스찬들은 성서에 기록된 말씀일 뿐만 아니라 또 성서학자들이나 목사들이 교리의 권위를 빌어 계속적으로 이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의심을 품으면서도 믿고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종말에 관한 성서의 이와같은 예언들을 문자주의해석으로 믿는 것 만이 과연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에 합치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떨쳐 버릴수는 없다. 우선 우리들의 이성이 납득이 안가며 과학적 사실과도 합치하지 않는 비합리성 때문에 고민하지만 그것보다도 성서는 반드시 비현실적, 비과학적으로 해석하여 믿어야만 제대로 믿는가 라는 점이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의 모든 자연법칙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그 하나님이 섭리역사를 주도해오시는 원칙은 비과학적, 비현실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게 해오시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즉 성서의 내용) 해석하고 깨달아야 하는 인간의 책임과 정성과 지혜에 의하여 밝혀질 천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오늘날까지 성서의 문자적인 기록에만 붙들려 공포주의 종말론이 횡행하고 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백일몽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21세기를 내다보는 오늘의 대명천지에 문자주의 성서종말론을 믿겠다고 호언장담하는 크리스챤들이 아니고 무엇이랴. 교회가 이런 미신적인 잠꼬대같은 소리나 중얼거리는 백일몽 환자들로 들끓게 되면서부터 세계의 구원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천사들과 구름을 타고 강림하는 예수의 재림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 땅위에서 계급투쟁과 폭력혁명을 통하여 실현된다는 땀의 종교, 물질의 종교가 나타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유물변증법의 세계관을 기저로한 공산주의인 것이다. 공산주의는 기독교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죽어서 간다는 전당이나 다스리고 너희들이 말세에 깨어져 없어져 버린다는 이땅의 역사와 세계의 통치는 우리에게 맡겨라고 부르짖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경문자의 노예가 된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황당무계한 역사관인 종말론 곧 기독교역사관을 뒤집어서 유물사관을 제시함으로써 언필칭 과학적 사회주의에 입각하여 역사를 해명한다고 장담하며 모든 면에서 자유세계에 사상적인 공세와 도전을 감행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성서를 유물론적으로까지 해석하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또한 지금 기독교의 일각에서는 당파성과 계급의식을 앞세운 사회사상으로 성서를 해석하려는 시도도 나오고 있지 않은가. 이런 맥락에서 근자에 논쟁이 되고있는 해방신학문제도 한국교회는 타산지석으로 알고 하루속히 한국교회의 바른 신학정립을 위하여 진지한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던 젊은이들이 유년주일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대학생이 되어 갈수록 교회의 그 캐캐묵은 미신적이고 비현실적인 황당무계한 설교들을 비웃으며 유물론적인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에 이끌려 들어가는 현실을 오늘의 교회는 무엇으로 대처할 것인가?
지면관계상 불심판 (벧후3:12) 에 관한 것 하나만 해명함으로써 우리는 종말에 관한 성서해석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성서는 「불」을 화력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또는 「말씀」도 불이라고 말한다 (벧후3:7) 곧 구약 말라기 4장 5절에는 메시아가 강림하는 날에 모든 악과 교만한 자들을 풀무불같은 불로써 심판한다고 했다. 과연 메시아로 온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왔으나 그 불이 붙지 않음을 탄식하셨다 (눅12:49), 예수님이 땅에 던져서 붙이려 했던 불은 화력이 아니요 진리 말씀이었던 것이다. 즉 예수님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세상을 심판하려 하신 것이다 (요12:48, 5:24, 고후2:8, 사11:4, 계19:l5). 그러므로 벧후 3장 7절에는 끝날에 하늘과 땅을 태울 불심판은 말씀심판임을 명시하고 있다. 왜 말씀으로 심판하시는가? 그것은 타락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본연의 목적을 이룩하지 못했으므로, 말씀의 완성체로 오신 예수님(요1/1∼14)은 그의 초림과 재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그말씀 이상 【창조이상】을 찾아 완성하셔야 하므로(요5:36) 사탄을 중심한 일체의 참이 아닌 말씀들(곧 모든 거짓된 이념·사상·이데올로기등) 이 심판받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의 끝날에 처한 성도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여 밝히실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요3:12, 6:12, 16:25, 계10:11등) 을 찾아서 그 진리대로 믿고 실천함으로써 말씀심판(불심판) 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요12:48 요5:24).

<기독교의 정체성과 종말론적 메시아니즘>
따라서 기독교는 확연하고도 현실적인 성서적 역사관을 제시하여 인류세계의 미래에 대한 책임있고 설득력있는 희망적인 비전을 제시해야만 한다. 교회가 밤낮으로 구름타고 오실 예수그리스도나 외치고 우주의 대파국과 불심판을 떠들어 대면서 신자들을 위협하며 헌금과 축복과 천당구원만을 되뇌이고 앉아 있다가는 이 세상을 마귀의 공세 앞에 두손 들고 내주고 마는 상황이 밀어닥칠 것이다. 교회의 우민화 현상이 성서의 문자 노예가 된 오늘의 교계의 지도자들 때문임을 모든 평신도들이 자각할 때는 온 것이다.
성서를 누가 그렇게 단정적으로 문자위주로 교리화 시켜서 종말은 이렇게 되어야하며 예수는 이렇게 재림해야하며 부활은 이렇게, 심판은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과 예수님에게는 결재받지 않고서 교회 지도층들이 역사적으로 교인들을 쉽게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채택한 것이 문자주의 교리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혹세무민하는 성서해석을 방지하기 위하여 때가 찰 때까지는 문자위주로 성서를 해석해야 한다고 하는 고충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성서의「참뜻」을 밝히고 하나님의 뜻대로 성서를 깨닫고 실천하는 최종·최선·유일·절대·불변의 방도임은 아닌 것을 이제 깨달아야 할 때는 온 것이다.
우리는 이천년전 예수께서 오셨을때 그 당시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교인들과 그 지도층들이 구약성서와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어떻게 대했는가를 살핌으로써 주의 재림기에 처할 끝날의 성도들이 신구약성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찾아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재림은 그가 살아간 일생대로 다시 온다고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장11절은 오늘날 모든 교회들이 승천하신 예수가 하늘에서 구름타고 다시 이스라엘 나라로 재강림하실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성구이지만 이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고 예수의 일생을 제자들이 보아왔던 것처럼 다시 온다는 의미인 것이다.
다시 한번 그 구절을 읽어보라. 하늘을 쳐다보면서 구름을 타고 초자연적으로 공중에서 재림할 예수를 기다리라는 뜻인지 아니면 지상에서 마리아의 복중을 통해 탄생하여 로마제국과 그 식민지에서 헤롯의 통치시대에 살면서 완고한 유대교단의 지도층들에 의하여 이단 신흥종교지도자로 박해받았던 예수님의 일생대로 다시 오신다는 뜻인지를 깊이 음미해볼 문제이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한 이성구는 구름타고 하늘에서 영광가운데 초자연적으로 재림하실 예수로만 이해해서는 안되고, 그가 재림할때는 이천년전의 예수 초림때의 역사적 상황과 시대적 동시성이 재현될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재림하는 예수는 역사의 현장으로 육신을 쓴 인자로 오시어 사탄에게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하는 일을 행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성경의 예언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밝힐 것을 약속드린다)
따라서 누가복음 17:25에 재림하시는 예수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된다」라는 수수께끼같은 예언의 의미도 이런 관점에서라야 바로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섭리의 종말기에 처할 기독성도들은 예수님의 초림때에 벌어졌던 역사적인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처형시켰던 것처럼, 다시 오실 메시아를 배반하고 박해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CR2호를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관한 우리들의 명백한 성서적 견해를 세상에 천명한 바가 있다.
예수님은 구약성서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케 하려 왔기 때문에(마5:17) 구약성서의 근본뜻을 밝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려 오셨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성경학자들 (율법사,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 장로들)은 구약의 인봉된 말씀을 자기들 나름대로의 지식이나 관습·전통·선입견 등으로만 이해함으로써 신앙적 교만과 폐쇄주의에 빠져 하나님의 섭리에는 오히려 무지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구약성서의 인봉된 비밀의 말씀을 인간적 지식으로 문자주의로 해석하다가 모든 면에서 예수의 구약해석과는 상반된 입장에 처하고 만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동일하게 구약성서를 해석하지 않는다고 갖은 반대와 더불어 이단자, 율법파괴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 귀신대장 바알세불등으로 그를 몰아부치기만 했던 것이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내용은 주로 이런 사실과 관련되어있는 것들이다) 이천년전 예수그리스도는 신의 창조목적인 하나님나라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의 청사진을 가지고 오셨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계획과 뜻을 제자들에게까지도 명백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상징과 비유로 말씀한 것이 대부분인 것이다 (마13:34∼35, 요16:5) . 왜 그랬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처한 당시의 어려운 종교적·정치적·사회적 상황때문이었다. 그는 자기가 처해있는 어려운 환경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제국의 강압적인 식민통치와 어떤 변화도 용납않는 헤롯중심의 군주체제, 나아가 전통에 얽매인 완고한 유대교단의 압력 등이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없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귀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눈14:35, 마13:43)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마11:14) 등으로 자기의 뜻을 암시적으로 나타낸 적이 많았던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수록한 신약의 많은 내용이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예수께서 자기의 뜻을 다 밝히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눅12:49, 요3:12, 요16:12)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는 유대교단의 바리새주의적 구약해석자들에게는 율법의 파괴자로, 이단 신흥종교 창시자로서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또한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독신자라는 종교적 이단자의 죄목으로 고발당하고, 헤롯과 로마제국의 눈에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요, 민중선동자란 정치적 죄목으로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게 된 것이다. 그를 죽이자고 앞장섰던 자들은 다름아닌 유대교단의 실권자였던 산헤드린의 지도자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 등이었던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구약을 문자위주로 해석한 척도에 의하여 예수님의 복음말씀을 단죄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도 구원섭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비유와 상징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아직도 인봉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구약성경의 말씀이 온전히 해명될 날은 예수의 재림기가 되지 않고서는 가당찮은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수백개 교파로 갈라진 기독교가 제각각 내거는 교리와 신학이라는 것들이 성서를 완전히 다 해명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믿어야만 구원받고 천당간다는 식으로 강변하는 것은 독단에 불과한 신앙적 교만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나름대로 주입받은 해묵은 교리와 소위 정통신학이란 것들을 맹목적으로 절대시하면서 자기와 다른 교리나 성서해석에 대해서는 무조건 배타적으로 질시하고 저주하는 태도로 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열린 마음과 자세로 임해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수께끼와 같은 암호의 말씀인 성서를 내리신 분이 하나님이므로 우리는 그외의 어떤 인간적인 지식으로나 학문으로 성서를 연구한 교리와 신학을 맹목적으로 믿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때 신구약성서의 모든 비유와 상징의 말씀이 온전히 해명될텐데(고전13:9∼11, 계10:11) 그때 과거의 성경해석만으로 마음과 귀가 굳어진 기독교인들은 그 새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성리에 역행한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인들과 같은 역전의 운명길을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앙적 교만과 독선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로 결과된다는 사실을 끝날의 기독교 지도층들이 명심해야할 교훈이다. 교만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가리워 지는 법이다 (마11:25∼26). 신앙적인 교만과 독선에 사로 잡혀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크리스천일수록, 정통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신자일수록 실족하기 쉬운 때가 주님이 다시 오실 역사의 추수기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날에 주여 주여하는 자가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의 뜻대로 행한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시며 여러가지로 신앙적인 열심과 자랑스런 표정으로 주님앞에 나설 많은 신자들이 주님에게 불법자가 될 것을 지적하셨으며(마7:22∼23),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l8:8)고 탄식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리새인들과 유대교지도층들은 자기들로서는 성서를 바로 믿는다고 믿었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예수님의 성서해석과는 틀린 신앙을 가짐으로써 주님을 배척하게 된것을 미루어 보아 주님이 다시 오실때도 그런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하신 것이다.요한복음 5:39∼47을 보면 유대인들이 구약성서는 열심히 읽으면서도 모세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믿었기 때문에 구약성서의 주인공이요 모세가 증언하려 했던 예수님을 배척하게 된 유대교인들의 교만과 무지를 통탄하신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현상이 반복될 가능성이 있기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당하고 이 세태에 버림을 받을 것이라고 (눅17:25)예언하신 것이 아닌가? 소위 교단의 어용신학자들이나 성서를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오래된 신앙자일수록 하나님의 섭리에는 더더욱 청맹과니가 되기 쉬운 법이니 자기가 알고 있는 성경지식이나 교리를 때가 찰 때까지는 절대시하여 폐쇄적인 신앙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고전4:5). 그러므로 히브리5:12∼14에 보면 오래된 신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재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 것이다.
구원섭리의 완성이 실현될 주님의 재림기가 가까와오면 신구약성경의 인봉된 모든 말씀이 온전히 밝혀질 것이니 (고전13:9∼11, 히5:11∼14. 단12: 4, 요l6:25, 계5:1∼5, 계10:7, 계10:7. , 계10:11, 계22:10) 그때가 바로 「때가 찰때요」「때가 이를때」인 것이다. 그때가 오면 모든 교파가 다시 오시는 주님의 온전한 새 말씀앞에 겸손히 엎드리어 그 말씀을 승복함으로써 끝내는 하나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와같은 시각에서 우리는 한권의 성경에서 갈라진 오늘날의 모든 교파 교회들이 화해하고, 대화와 이해를 통한 공동협력을 이룰 수 있는 기독교의 자기신원 확인이 가능해 진다고본다.
그리스도가 인류의 선의 시조로 (완성한 아담이상의 실현자)다시 오실때 모든 교회·교파들은 헤어진 친형제자매였음을 확인하고 눈물로 서로 하나가 되어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게 될 것이다. 즉 기독교의 본질과 그 정체성(Identity) 확립은 종말론적 메시아니즘에 입각해 볼때에라야 바르게 해명되고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종말론적 메시아니즘이란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완성될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재림예수님에 의하여야만이 성서의 전체적인 온전한 뜻이 해명되고 갈라진 교회들이 하나가 되어 기독교의 본질이 드러남으로써 모든 종교와 사상이 통일되며 지상의 모든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군사·인종·제도등의 이데올로기적인 갈등과 대립이 화해되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회복한 이상세계인 신천신지의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계21:1∼7)
그러므로 성서에는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나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9∼10)고 되어있는 것이다. 그때가 되기 전까지는 지상의 모든 기독교회들은 서로간에 비판하고 단죄하거나 배타·질시·반목·갈등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 열린 마음, 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화합하여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섬기는, 구원섭리의 동역자들로서 매진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갱신과 그 역사의식의 혁신>
우리는 CR시리즈 제2호「누가 예수를 죽기 위해 왔다고 가르치는가」에서 지금은 바울이 말한 「그때」 (고전13:9∼11)가 가까와 오므로 성서와 예수님에 대하여 온전히 알지 않으면 안된다고 밝히는 한편 현대기독교 교리의 코페르니쿠스격인 대전회를 선언하며 교회의 개혁과 일치를 촉구한 바 있다. 그 글이 발표되자 국내외로부터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보여준 뜨거운 반응과 열렬한 격려는 과연 때가 성숙해 오고 있음을 입증하고도 남을 만 하였음을 부기하는 바이다.
그런데 왜 오늘의 교회가 지금까지 이와같은 백일몽 환자와 같은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글의 윗부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교가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그 창조 이상세계를 모르는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이상과 그 목적이 완성적으로 실현된 창조본연의 세계의 내용을 모르고는 종말이 왜, 어떻게 올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예수님의 재림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창조본연의 이상세계를 회복하는 것이기 (행l:6, 마17:16, 행3:21)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시록 22장 13∼14절에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즉 알파(처음, 시작)에 세우신 이상과 목적을 오랜 구원섭리의 과정을 통하여 오메가(끝, 마지막)로 다시 회복하신다는 내용이다.
알파, 시작, 처음의 내용을 모르고 종말인 오메가 끝,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에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곧 하나님이 태초에 세우신 창조이상대로)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즉 종말에 그 창조이상이 전지구와 우주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마6:10)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인류의 시조로 창조하시면서 축복하신 삼대축복 (창1:28) 을 중심한 창조목적을 예수님의 초림과 그 재림을 통하여 기필코 찾아 이루시려는 것이 (사46:11) 성서의 근본내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에는 아담을 오실자의 표상이요 (롬5:14) 예수님을 후아담 (고전15:45) 이라고 했으며, 아담의 타락으로 상실해버린 창세기 3장의 생명나무이상 (알파) 을 요한계시록 22장의 생명나무 (오메가)로 복귀한다고 되어있는 것이다. 타락한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의인이 된다고 한 말씀도(롬5:19,고전l5:21) 하나님의 아담창조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통하여 복귀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완성이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오랜 세월동안 구원섭리를 통하여 연장되어 나오다가 예수의 재림을 통하여 다시 그 창조 목적이 완성된 세계의 상태로 복귀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와같은 시각으로 보면 역사의 종말에 이루어질 주의 재림은 어떻게 실현될 것이며 여러가지 말세징조들이 문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그 비유의 분명한 의미가 아무런 상충없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창세 이래 수많은 믿음의 인물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섭리해 오신 하나님의 구원섭리역사의 청사진을 인류역사 속에서 확연히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크리스찬들은 분명히 이 지상의 역사가 신의 구원섭리와 현실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 이 시대는 섭리의 어느 시점에 와 있는가를 깨닫게 되고 따라서 이 시대의 크리스찬들은 주님의 섭리의 완성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책임의식과 역사적 소명감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담대히 말하는 너희들은 무슨 근거로 이처럼 자신있게 성서와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는가고.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이렇게 답한다. 지금은 고린도 전서13장 9∼11절에서 말한 성숙한 「그때」 가가까왔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아신 것 같이 우리도 주님을 온전히 알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때를 모르는 크리스챤은 역사의 소경된 자요, 섭리의 귀머거리 된 자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섭리의 중요한 때인 주님의 재림시기에 대해서는 아부도 모르도록 되어있다고 한 기록이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마태복음 24:30절에 예수님의 재림의 날과 그때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시고, 천사들도 아들 (예수자신) 도 모른다고 한 것이다. 또한 주님은 방중 도적같이 오신다 (살전5:4) 고도 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모르는 때에 갑자기 초자연적으로 주가 재림할 것이라고 되어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에서는 위의 성구들에 근거하여 주님이 다시 오실때는 알 수 없다고 만 가르쳐 왔다. 그러나 우리가 성서롤 다시 상고해 볼때 「하나님은 자기의 비밀을 그중 선지자들에게 가르쳐 주시지 않고는 아무 것도 행하시지 않는다」 (암3:7)고 하셨고 빛가운데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도적 같이 임하지 못한다고(살전5:4, 눅21:34∼36, 마25:1∼13, 계3:3)도 하셨던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구원섭리역사에 있어서 몇번 나타난 중요한 종말적인 대 심판이나 전환시대에는 언제나 그 시대의 깨어있는 선지자에게는 그 때를 미리 계시하시고야 섭리를 행하셨던 것이다. 예컨대 노아의 홍수심판때도 하나님은 의인 노아에게는 미리 알려 주시어 섭리를 준비케 하셨고(창6:13, 17:26 26이하)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하실 때도 의인 아부라함과 는 일족에게는 알려 주셨으며 (창l8:l7절이하, 창18:17) 또한 예수님때도 동방박사, 마리아, 세례요한, 시몬 ,안나 등에게는 주님이 오셨음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따라서 구원섭리의 그랜드피날레요, 사탄마귀를 굴복시키어 하나님과 인류가 소망해 오던창조본연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 (지상천국, 천상천국) 가 실현되는 구원섭리의 디데이 (D-Day) 인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섭리이므로 깨어있는 성도들에게는 반드시 알려주시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등불을 준비하여 끝까지 정성을 다해 기다리는 다섯명의 처녀는 신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마25장). 그러므로 누가복음 17장26절 이하에는 노아의 때나 롯의 때와 같이 인자의 오시는 때도 그러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노아와 롯은 그때를 알고 주위의 조롱과 비난을 감수하면서 심판의 날을 위하여 수고하였지만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은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재림때에도 반드시 노아나 아브라함같은 의인과 선지자는 하나님의 소명으로 그때를 알고 종말의 때를 준비하기 위하여 잠든 교회와 인류를 깨우려고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선지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이 시대의 노아나 아브라함이 되고자하는 기독청년들이다. 잠든 교회를 깨우고자 하나님은 우리들을 부르셨다.
우리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소명앞에 엄숙히 그 책임을 다해 나갈 것이다. 따라서 ICSA의CR운동은 지금이야말로 모든 교회는 종말론적 메시아니즘의 시각에서 열린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고 역사의 소명에 응답하자는 운동이며 이단 논쟁을 일삼으며, 같은 형제끼리 물고 뜯고 교회를 분열, 약화시킴으로써 교회를 계속적으로 우민화하려는 교회안의 모든 인위적인 거침돌들을 제거하자는 개혁 (Refornation)과 화해(Reconcliation)의 청년운동이다.
우리들의 이와같은 열망은 일생을 통하여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오로지 한국과 세계기독교의 섭리적 소명을 일깨워 예수님의 소망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겠다는 일념으로 수고해온 문선명목사를 만남으로써 ICSA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화해와 개혁을 의한 ICSA운동이 출범된 후 국내외 각계각층의 교계인사들이 계속적으로 흔쾌한 성원과 참여를 표명해오고 있음은 더욱 대항한 한 일이라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젊은이들을 하나님의 올바른 구원섭리의 역사의 광장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늘의 기독교는 복음의 새로운 지평을 열므로써 분명한 역사의식(관)을 제시하여야만 한다.
민족사이든 세계사이든 역사를 바로 설명하여 그 섭리적 정통성을 해명하는 것이 이 시대의 기독교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임을 다시 한번 지적한다. 그리하여야만 한국교회의 일천만 크리스찬들이 우리민족의 역사와 그 미래에 대하여 책임질 수 있는 위치로 나아갈 것이며 세계의 기독교 또한 세계를 책임질 수 있는 섭리의 견인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때 오늘날 우리의 젊은이들이 백일몽만 꾸고 있는 교회의 문을 박차고 나아가 온갖 이데올로기의 첫발에 현혹되고 있는 이 안타까운 현실을 타개해 나가 있게 될 것이다.교회여, 역사와 현실에 질문을 던지는 우리 젊은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역사에 관하여 서론적인 내용으로 글을 마치게 되었다. 앞으로 기독교 역사관에 대하여 보다 깊이 밝힐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아멘.
l984년10월 <교회갱신 주간에 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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