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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와이 최대 토목회사「토월」사 김창원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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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사회에서 한국인이 백인과 경쟁, 성공하기란 매우 힘들다. 조그마한 사업으로 출발, 큰 기업을 일으켜 막대한 재산을 모으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백인회사에 들어가 그들과의 피나는 경쟁에서 이겨 끝내 그들을 통솔하는 최고의 지위에 오르는 경우는 실로 드문일이다.
하와이교민2세인 김창원씨(55)는 하와이주 최대 토목설계용역회사인 토월사의 회장겸 사장이다. 1958년에 토목기사로 입사, 20년만인 78년 사장이 되고 다시 2년후에는 회장직에 까지올랐다.
토월사의 설계용역수주액은 연간 6백만달러. 건설회사가 아니라서 외형은 크지 않지만 사원이 1백여명으로 캘리포니아주 및 괌등지에 지사가 여러곳 있다.
김씨의 연봉은 l5만달러. 이외에 회사주식의 14%를 갖고있어 1년에 2만여달러의 주식배당도 받는다.

<연봉만도 15만불>
김씨의 오늘날이 있기까지에는 피나는 고생이 있었다. 이민초기에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일떠난 부친의 권유로 53년 다니던 서울대공대 화공과를 중퇴하고 부산수영비행장에서 미군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무일푼으로 유학길에 오른 김씨는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고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와이대학교 공과대학에 등록을 마친 그는 곧 시간제 일을 찾아나섰다. 첫학기 동록금은 아버지가 마련해주었으나 당장 책값과 용돈이 없었으며 앞으로의 등록금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학생이 일반적으로 하던 접시닦기 잔디깎기는 물론, 구둣방에서 신발도 기웠으며 방학기간 중에는 멀리 파인애플농장에까지 일을 찾아 나셨다.
3개월간의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그는 당시 몇몇 안되는 한국유학생들파 함께 오아후섬 중부에 있는 파인애플농장에 갔다.
세계적인 파인애플통조림 메이커인 델몬테사가 경영하는 CPC농장이 주로 이들이 일했던 곳.
파인애플을 따는 일은 너무나 고된 작업이였다. 농장의 허름한집 한칸을 빌어 자취생활을하며 상오 5시반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점심도시락을 싸들고 농장에 갔다.
밭고랑 양쪽의 파인애플을 따 부대에 담는데 20개정도만 채우면 무게가 80kg이나 나가 나중에는 질실 끌다시피 해서 트럭에 실었다. 잘 익은 파인애플 하나의 무게는 4kg이나 나갔다.
그러나 힘으로 버티는 일은 그래도 견딜만 했다. 파인애플의 뾰족한 잎사귀에 찔리지 않기 위해 몸은 중무장을 해야했다.

<돈주고 못사는고생>
바지와 웃옷은 두꺼운 작업복을 두벌 껴입고 손에는 가죽장갑을 끼고 밀짚모자를 눌러쓴다음 철망으로 만든 모기장 모양의 눈가리개를 착용해야 했기 때문에 농장일은 한여름의 한증막이었다. 너무나 힘든 일이라 하루일하고 그만둔 유학생도 많았다.
하루 8시간의 작업중 즐거운시간은 점심식사후 트럭밑에 들어가 잠시 조는 것뿐이다. 이렇게 힘든 일로 버는 일당은 시간당 60센트로 하루평균 5달러정도. 석달일해야 4백50∼5백달러 가까이 벌 수 있었다.
김씨는 경험한 일 중 잔디깎는 일을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회상하고 있다. 잔디발 손질은 보통 2시간이면 끝나는 일이나 잔디밭 중앙부위는 기계로 하는 단순작업이지만 가장자리는 일일이 가위질을 해야하기 때문에 한바퀴 돌고 나면 손에 알이 배고 손바닥에 물집이 생겨 다음날 수업시간에 제대로 연필을 쥘 수 없었다고 한다.

<서울에도 용역사>
김씨는 이때의 고생은 돈주고도 살수없는 소중한 것이었으며 그같은 경험이 이제까지 사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있다고 했다.
이렇게 번돈으로 김씨는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등록금은 다행히도 장학금으로 해결하고 책값과 잡비는 번돈으로 그럭저럭 충당할 수 있었다.
고학으로 5년만에 토목공학석사학위를 마친 김씨는 58년 토윌사에 토목기사로 입사했다.
13년만에 수석부사장이 된 그는 78년 사장으로 승진한뒤 드디어 80년에 최고직위인 회장에 취임했다.
그의 남다른 노력과 성실한 근무자세는 창업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많은 백인들을 물리칠수있게 만들었다. 그는 토윌사의 회장직외에 자매회사인 월리스사(에너지분야)와 제넥스사(무역) 및 토윌사의 모회사인 킬로하나사의 회장직도 겸하고있다. 82년에는 주한미군이 시행하는 토목공사에 참여하고자 서울에 암코라는 용역회사도 설립했다.
김씨는 한때 기자생활도 했다. 학창시절 고학하던 틈틈이 시간을 내 당시 동지회에서 발간하던 태평양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으며 졸업후인 58년부터 7O년까지 주필로 일했다.
교민사회에서의 그의 활약상도 두드러진다.

<경영이 훨씬 어렵다>
67년부터 2년간 하와이 한국교민단체협의회 회장도 역임했으며 한인 청소년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는 교회를 통한 보이스카웃 운동을 벌여 청소년 선도에 앞장서고 있으며 호놀룰루의 일본계 미국인인 YMCA 책임자를 설득, 한인사회를 위한 모금운동을 하게 하기도 했다. 또한 지난해 부터는 청소년선도클럽을 조직, 교민 2,3세 청소년들이 문제학생이 되지 않도록 각종 운동회·파티·회의를 마련하고 학교등을 방문해가며 선도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기업경영철학은「성실한 관리」다. 전공인 토목공학보다도 경영이 훨씬 어렵다는 그는 확장보다는 내실위주로 회사를 경영해 웬만한 시련기에도 버틸수있는 회사를 만드는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했다.
일이 바빠 30대 중반에 결혼했다는 김씨는 나이에 비해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있는데 지금도 사회활동이 많아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지만 한국교민인 자신이 백인사회에서 버틸 수 있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희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간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하와이 = 정봉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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