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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 떠있는 첨단 열람실 옛 것과 새 것 어우러진 사유의 공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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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호 24면

1 서울대 관정도서관의 외부 모습. 옛 중앙도서관의 측면과 상층부를 기역자로 덮는 모양이다.
2 유태용 테제건축 대표.

외국에 나가면 갤러리·박물관만큼 즐겨 찾는 곳이 도서관이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장소 자체가 주는 즐거움 때문이다. 잠시 세상과 분리된 채 조용한 서가를 거닐고 오래된 종이 냄새에 취해 보는 경험도 남다르거니와, 도서관이 세워진 역사와 배경까지 깨치고 나면 가장 지적인 문화 기행을 했다는 정신적 풍족감까지 들어서다. 게다가 건물 역시 그냥 지나칠 것이 아니다. 도서관은 오래전부터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곳이 많다. 피렌체의 ‘메디치아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은 미켈란젤로, ‘시애틀 공공 도서관’은 렘 콜하스의 손끝에서 탄생됐다.

서울대 관정도서관 설계자 유태용이 말하는 ‘내 작품’

지난 2월 개관한 서울대 관정도서관은 이같은 맥락에서 주목받을 만한 공간이다. 원래 있던 중앙도서관 옆으로 들어선 지상 8층, 약 2만7242㎡ 규모의 새로운 면학 공간이다. 흔히 생각하는 증축이나 신축과 달리 옆 건물의 측면과 상부를 감싸 안고 있다. 기존 도서관을 그대로 둔 채, 기역자로 건물 상부가 공중부양하듯 붕뜬 구조다. 옛 것과 새 것이 조화를 이룬 아이디어다.

S매거진은 햇볕이 따뜻한 5월 초, 도서관 탐방에 나섰다. 테제건축 유태용(61) 대표가 동행했다. 그는 이 관정도서관을 설계한 주인공이자 호림아트센터·한국경제신문 사옥 등 서울 도심의 대표 건물들을 설계한 인물이다. 그로부터 새 도서관의 건축 미학을 오롯이 들었다.

3 알루미늄 모듈로 꾸민 관정도서관은 날씨에 따라 색이 달라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4 본관 옥상을 꾸민 정원.

기존 도서관을 기역자로 ‘품는’ 건물
유 대표는 오후 네 시에 만나자고 했다. 햇살이 한풀 꺾일락말락, 딱 그때가 좋겠다면서. 빛이 왜 그리 중요했는지는 현장에 가서야 알았다. 새 도서관의 외벽은 호사로웠고 반짝반짝 빛났다. 튀어나오고 들어간 알루미늄 조각이 4000여 개나 붙어있으니 당연했다. “비오는 날, 흐린 날, 맑은 날날씨따라 보이는 게 다 달라요. 초콜릿 색깔도 되고, 파랗기도 하고. 오늘은 어때 보여요?”

그는 건물에 들어가기 전 잠시 건축학 개론을 펼쳤다. 그것은 그가 건물을 스케치로 그려내기 전 구상이기도 했다. “1975년에 중앙도서관이 들어섰을 땐 캠퍼스의 중심이었죠. 대학본부나 교수회관보다 훨씬 컸고 위치로도 딱 가운데였어요. 오른쪽은 인문대, 왼쪽엔 자연대와 이공대로요. 그런데 점점 건물이 많아지면서 그 부채꼴 축이 희석되고 말았죠. 생각했어요. 대학의 중심이 되는 도서관, 그 축을 복원시켜보자고요.”

40년 전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고 그 역시 서울대 졸업생이겠지 했는데 단박에 아니란다. 한양대 건축공학과를 나온 그는 대부분의 서울대 건물을 졸업생들이 맡는 관례를 깼다. ‘발탁’ 배경이 있었다. “관정도서관은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이종환 전 이사장이 600억원을 기부하며 성사될 수 있었죠. 그 분이 저를 점찍었어요. 예전에 재단에서 호텔 설계 공모가 있었는데 그때 눈여겨 봤다고 하대요.”

건축가에게는 건축주의 의견을 반영하는 게 중요하다. 그에게도 관정과 서울대의 요구가 있었다. 관정은 ‘국내에서 가장 크고 멋진 도서관’을 원했고, 서울대는 옛 도서관의 역사적 가치는 유지되길 바랐다. ‘기역자 도서관’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제가 관정에게 그랬죠. 이렇게 지으면 가장 크기도 크지만 아예 옛날 도서관까지 품는 거라고요.” 동시에 본관 건물은 물론 계단-80~90년대 학생 운동의 역사 현장-까지 자연스럽게 보존됐다.

그는 이를 “신의 한 수”라 칭했지만 실현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존 도서관 위로 새 도서관이 올려지지만 하중이 없어야 하고, 또 한쪽 면은 18m가 더 튀어나와 기둥 없이 공중에 떠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해 도입된 것이 리프팅&슬라이딩 공법이었다. 쉽게 말해 땅 위에서 먼저 한 층의 철골 구조물(트러스)을 조립하고, 이를 들어올린 뒤 레일에 따라 적정 위치로 이동시키는 골조 방식이다. 시공을 맡은 대우건설은 주로 교량 건설에 쓰이는 공법을 새 도서관에 적용시켰다.

5 열람실의 천장까지 꽉 채운 서가 6 열람실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양쪽 창문이 열린 모양이지만 반대 방향에선 닫힌듯 보인다.

기둥 없이 165m 길이로 뻥 뚫린 열람실
그 결과물이 어떤 것인지는 도서관 7·8층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각각 ‘기억의 방’ ‘이성의 방’ ‘이라 이름 붙인 열람실-. ‘100m 달리기를 해도 되겠다’ 싶게 너른 공간이 한 눈에 들어왔는데, 실제 길이가 165m나 된단다. 더구나 이 곳을 받쳐주는 기둥이 없어 더 넓어 보인다. 기존 건물의 기둥을 뚫어 연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여기엔 삼각 모양의 강도 높은 철강 지지대가 남아 마치 한강 다리를 안으로 들인 것 같다.

마냥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는 사이 유 대표가 말을 걸어온다. 더 신기한 게 있단다. “입구에서 안쪽으로 쭉 걸어가며 좌우 창을 보세요. 모두 열려 있는 모습일 거예요. 그리고 다시 돌아오며 창을 보세요. 이번엔 반대로 닫힌 모양일 겁니다.”

실제로 그랬다. 창은 두 얼굴이었다. 파란 하늘이 보이는 열린 통로가 순식 간에 햇빛을 차단하는 칸막이가 됐다. 가까이 가서 보니 창은 그냥 평면 사각이 아니었다. 사다리꼴에 반은 나무 반은 유리였다. 그 모듈이 벌집처럼 꽉 짜여진 모양이었다. 도서관 밖에서 보던 알루미늄 모듈과 같았다. “건물의 외관과 내부를 탈이라고 보면 되죠. 안팎의 인테리어가 다른 게 아니라 하나인 형태죠.”

7·8층 대형 열람실은 1786석. 분위기도 한 마디로 ‘도서관답다’. 수험서를 가득 쌓아놓고 공부하거나, 자리맡기 경쟁이 붙는 대학 도서관 풍경이 아니다. 매끈하게 디자인 된 너른 테이블과 개인 조명등까지, 절로 독서 삼매경에 빠질 듯한 분위기다. 투어에 동행한 김미향 관정관서비스팀장이 설명을 보탠다. “새 도서관을 만들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에요. 말 그대로 책을 읽는 곳을 만들자는 거죠. 지금의 대학 도서관은 독서실이 됐죠. 최고 지성의 전당이라는 점에서 시험 준비가 아닌 진짜 공부를 할 곳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김 팀장은 이를 위해 세계 도서관을 다니며 벤치마킹 할 요소들을 찾았다. 그중 천장까지 빼곡히 뻗은 서가는 그가 가장 탐낸 포인트다.

7 옛 건물인 본관의 외벽을 그대로 살린 모습. 8 건물 내부의 조경은 작은 휴식이 된다.

옛 건물의 외벽을 새 건물의 내부 벽으로 활용
장르가 뭐가 됐든 옛 것과 새 것이 통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건물은 더하다. 번지르르하게 윤기 나는 새 것에 홀려 옛 것은 더욱 초라해 보인다. 이 도서관 역시 예외일 리 없다. 하지만 그 간극을 메우려했던 시도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본관 옥상 4층에 꾸민 '옥상정원'이 그랬다. 신관에서 통하는 문을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시야가 확 트인다. 도서관 자체가 캠퍼스의 중심이니 학내는 물론 관악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멋진 풍광이 있다. 게다가 조경학과 정욱주 교수가 조경 설계를 맡아 병아리꽃나무·매자나무·구절초·억새 등 다양한 꽃과 나무, 거기에 나무데크가 어우러진 공간을 꾸며놨다. 도서관 투어에서 빠지지 않는 인기 촬영지점이 되는 이유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와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이 못지 않은 지점이 있다. 윗층과 달리 1~3층은 본관과 붙어있다. 그 경계의 지점을 살피니 구관의 서가가 유리창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말하자면 옛 건물의 외관 벽이 새 건물의 내부 벽이 됐다. 돈 주고도 한다는 빈티지 인테리어 그 자체다. 유 대표는 처음부터 ‘구관의 외벽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벽 청소만 했다고 한다. 밖과 안이,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을 시작했다.

도서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그새 날씨가 변덕이다. 흐린 하늘에 바람이 분다. 건물을 다시 올려다 본다. 구릿빛 같던 처음과 달리 초콜릿빛이다. 변화를 이야기하니 그는 ‘빨갛게 보인다’는 소리도 들었다고 한다. 아무리 변화무쌍하다지만 좀 과장이다 싶다. 이런 속내를 아는듯 그가 말을 잇는다. “이 건물을 지으면서 ‘충만한 건물’을 지으려 했어요. 충만이라는 게 뭐겠어요.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이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건물이 보는 사람을 투영하는, 그런 곳을 짓고 싶었죠.”

투어 전 그는 “도서관은 방대한 자료의 집합소이자 지성의 전당이니만큼 가장 단순하게 지으려 했다”고 했다.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마음을 비추는 건물, 그것만큼 복잡한 건축이 어디 있겠는가.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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