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7세기의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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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일본발로 『구다라나이』는 「시시하다」, 「값없다」는 뜻이다.
바로 이 말의 뿌리는 「구다라」다. 「구다라」는 『백제』를 뜻하며 「구다라나이」는 『백제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된다.
고대일본에 있어 백제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이 한마디로 간단히 알 수 있다.
어디 백제만인가. 신라와 고구려가 일본의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바는 일본 학자들의 고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역사학자「이노우에」(정상광정·동경대 명예교수)는 『마치 명치시대 구미의 외인교수가 유럽문명을 이식해준 역할과 유사한 것』이었다고 기록할 정도다.
일황「히로히또」가 전대통령을 맞는 만찬의 자리에서 『기원 6, 7세기 우리나라 국가형성의 시대에는 다수의 귀국인이 도래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해 학문·문화·기술 등을 가르쳤다』고 공언한 것은 바로 그걸 두고 한 말이다.
일황의 발언은 정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일본문화의 「스승」이 한민족이었다는 사실을 일본 교과서에서조차 외면해온 일본의 국민감정과 왜곡된 지성을 일축하고 사실을 솔직이 인정, 공개했다는 점에서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진실로 유감」이란 표현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실효도 있는 발언이다.
일본 고대문화를 일으킨 성덕태자는 6세기말에 백제 승려 혜총과 고구려승려 혜자를 스승으로 모셨다.
고구려의 혜관은 특히 일본 삼론종을 일으키고 승려의 최고위직인 승정이 되었다. 건전농학의 새로운 기술이나 직조기술도 이때 도입되었다. 행정조직인 「고오리」(군)제도는 우리 삼국의 「고을제」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벌써 4세기에 백제의 아직기와 주인은 일본에 경서와 한자를 전했다.
6세기초엔 「오경박사」단양이(단양이)와 고안무가 오경을 강의했다. 역박사 왕도간, 역박사 왕보손, 의박사 왕유전강, 채약수 반여풍·정유타, 그리고 악인 삼근도 파견됐다고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다.
백제 성왕때 노리사치계로 하여금 불상과 경론을 전한 것은 불자전래의 효시였다. 조불공·조사공·거반박사·와박사·화공 등 기술자가 집단적으로 이주했던 것도 그때다.
고구려인 담징(담징)은 법륭사금당의 벽화를 그리고 그림물감과 종이·먹의 제조법도 가르쳤다. 고구려인은 그밖에 철순 등 무기제조들을 전했으며, 신라인은 조선술, 제·지측조술, 도기제조술을 가르쳤다.
유명한 법흥사(비조사)와 아스까 대불은 바로 백제인의 작품이다. 또 광륭사와 사천왕사는 신라계인의 사유사찰이었다.
철학자「야스페르스」가 『어떤 언어로도 미치지 못할 곳에서 영원한 미소를 띠고 있다』고 절찬한 일본 국보1호 광륭사의 미륵보살상은 일본엔 없는 우리나라의 적송으로 신라의 조각가가 만든 것이다.
역사는 숨길 수 없다. 한민족의 문화전수가 다만 일본국가 형성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도 지금 되새겨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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