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4)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37) 현민과 「카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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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낙산문학회에 대한 이야기는 현민 유진오와 늘 연락이 있었다. 처음에 그 일을 시작할때 현민에게 그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는 김재철을 잘 모르지만 조규선이 그렇게 말한다니 그럼 잘 해보라고 하였다. 나중에 일이 안되어 또 그 이야기를 했더니 현민은 웃으면서 잡지를 낸다는 것이 어디 쉬운일이냐고 하면서 졸업생들이 내는 학술잡지 『신흥』 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2학년때 러시아말 강의가 신설되어 처음에는 학생들이 꽤많이 모여들었다. 현민은 그때 그냥 형법연구실 조수로 있었고 최×달이 상법연구실조수로 임명되었는데 이 두사람이 러시아어강의시간에 들어왔다.
강사는「치르킨」이란 분으로 키가 훤칠하게 크고 세련된 모습이 외교관 출신다왔다. 그는 제정러시아때에 경성주재부영사로 있다가 혁명이 일어나자 돌아가지 않고 그냥 서울에 남아있었다.
러시아말은 글자도 영어글자와 다르고 문법이 퍽 까다로왔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학생들이 많이 모였지만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고 더구나 「치르킨」선생이 교과서로 지정한 책이 너무 비싸서 사는 학생이 없었다. 상해에서 발행한 영어로 설명한 책인데 값이 l5원이었다. 당시의 15원은 무척 큰돈이었다. 대부분의 영어책이『에브리맨스·라이브러리』같은 것은 3실링6펜스였고 그 밖의 책도 비싸야 4∼5원 정도였다.
그 당시는 몹시 불경기여서 생활이 모두 어려웠고 실업자 천지여서 도무지 물건이 팔리지 않아 장사가 안되었다. 졸업생 취직도 아주 어려워 많이들 놀고 있었다.
현민과 최 두분도 어느덧 강의시간에 안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때 현민이 나보고 낙산문학에 내려고 준비했다가 못내고 그냥가지고있는 소설원고를 자기에게 달라고하였다. 송봉우가 발행하고 있는 종합잡지 『비판』 에서 원고를 달라고하니 거기에 주겠다는 것이었다.
현민에게는 대학생 시대부터 원고청탁이 들어와 1927년 대학 2학년때 이미 잡지 『조선지광』에『스리』 『복수』같은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조수로 있을때에는 당당한 신진작가로 이롬을 날리고 있었다. 『스리』 『복수』는 당시일본에서 유행하던 횡광리일, 천단강성등 신감각파 냄새가 나는 작품이어서 김기진이 『조선지광』의 문예시평에서 『이 무슨 교태이뇨』하고 소설 『스리』를 야유하던 것이 생각난다.
29년『오월의 구직자 』를 발표한뒤부터 현민은 동반자작가로 불리게 되었고 이 무렵부터 「카프」측에서 기왕이면 동반자작가로 어정쩡하게 있을것이 아니라 아주 「카프」로 들어오라고 몇번이나 권고하여 왔다고 현민자신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좀더 들으면 동반자작가란 어떻것이며 현민자신의 거기에 대한 생각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나와 이효석이 작품을 발표한 전후부터 문학활동을 한 사람중에는 이무영 채만식 박화성 최정희 강경애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좌우가 한창 대립해있는 가운데 대체로 좌익의 노선을 따라가는듯하면서 조직상으로는 좌익에 가담하지 않았기때문에 세상에서는 한때 이들을 「동반자작가」라고 불렀다.
동반자작가라는 말은 1923년「트로츠키」가 지어낸 말로 소련 혁명을 따라는가면서도 문학의 독자성을 고집하고 즐겨 혁명의 그늘진 면을 그리는 구지식계급 출신의 작가를 일컫던 말인데 우리나라 경우에 그말이 그대로 적합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중략)나는 「카프」조직에 가담한 일도 없고 또 문학작품에 있어서의 사상성이나 정치성의우위는 결코 승복하지 않았다. 1930년께 임×가 동경에서 돌아오자 임과 함께「카프」사람들이 나에게「카프」가맹을 권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작품을 쓰는데는 단체에 가입할 필요가 없다는것이 나의 신조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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