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기 어제와 오늘|가난속에 농사일 거들며 체력단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하느님 감사합니다. 드디어해냈읍니다.드디어….』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2kg급에서 한국선수단에 첫금메달을 안겨준 김원기(김원기·22·상무)는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전남 함평농고 1년생이던 김을 발굴, 오늘의 대기(대기)로 키워온 최경수(최경수·39)코치는 『내가 못이룬꿈을 원기가 마침내 실현하다니…』라며 목이 메었다.
LA올림픽시찰연수단의 일원으로 참가, 이날 감격의 순간을 지켜본 최코치는 지난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했던 레슬링 국가대표출신. 당시 최코치는 김과같은 62kg급에 출전했으나 예선에서 탈락, 분투를 삼켰던 비운의주인공으로 올림픽의 한(한)을 품어온 터였다.
김원기의 어린시절은 한마디로 생존을위한 투쟁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62년1윌 전남함평군대동면백호리보화촌에서 6남매의세째아들로 태어난 김은 13살되던해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정일례씨(정일예·64)와 맏형 김원산씨 (김원산·46·함평군농지개량조합근무)의 품안에서 근근이 끼니를 이어가며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야했다.
중학교때 권투와 씨름을 시작하자 돌아간 김군의 아버지는 『싸움이나 배워서 무엇하느냐』고 말렸다.
그러나 운동에 취미를 붙인 김선수는 아버지눈을 피해 운동을 계속했다.
함평중을 거쳐 78년 함평농고에 입학한 김은 공부도잘해 대학진학의 꿈을 부풀렸으나 집안형편이 어려워 감히 엄두조차 낼수없었다.
이때 새로 체육교사로 부임해온 최코치는 레술링부를 창단, 후배지도를 자원하고 나섰고, 이에 뜻을 같이한 학생들이 하나들 모여들어 25명이 선발됐다.
처음 한동안망설였던 김도 『레슬링을 잘하면 장학생으로 대학엘 갈수있다』는 최코치의 설득에 못이겨 레슬링부 창단멤버로끼게됐다.
남달리 성실한데다 향학열에만 몰두해있던 김으로서는 대학진학을 위한 방편으로 택한 길이기도했다.
그러나 잘먹지도 못하고 자란 탓인지 다른 선수들에비해 체력이 달렸고, 계속된 반복훈련으로 귀가해서는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어떤날은연습이 하도 고되 훈련을 마다하고 학교뒷산으로 달아나기도 했다.
그럴때면 최코치는 김을 다그치기 예사였고『대학에 가기 싫거든 레슬링을 집어치우라』 고 불호령을 내리곤 했다.
남달리 성실했던 김에겐 최코치의 격려가 큰 힘으로 작용했고, 이에자극, 스스로를 채찍질해가며 훈련에 몰두할수 있었다.
이렇게 출범한 함평농고 레슬링부는 이후 전국대회를 석권해오면서 한국레슬링대표선수의 산실로 자리를 굳혀오고 있다.
김과 함께 이번대회에 출전하고 있는 74kg급의 김영남(김영남) 박병휴(박병휴)등도 이때 함께 입문한 동료들.
이들 트리오가 지난3년동안 국내경기에서 따낸 금메달만도 무려 30여개.
그러나 이들은 언제나 선배 방대두(방대두·30)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못했고 그나마 세계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해「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해왔다.
함평중·농고를 다니는 6년동안 김선수는 집에서 6km가량 떨어진 학교까지 매일 걸어서 통학했으며 이때도 걷지않고 뛰어다녔다고 동네친구들은 말했다.
아침저녁 6km를 구보통학과 함께 양파수확·모내기등 거친 농사일을 하며 강인한체력과 인내력을 기른것이 오늘 영광의 토대가 됐을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80년 전남대 체육과에 진학한 김은 지난 82년 전국체전에서 강호를 누르고 금메달을 따내면서 국가대표로 발탁,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그것도 잠시, 지난2윌 스웨덴의 메라컵대회에 국가대표로출전했으나 예선에서 탈락하는등 부진, 높게 평가받진못했다.
그러나 김은 국제대회라곤 처녀출전한 이대회에서 유럽의 강호들과 대결, 어느정도 자신을 얻었다고 그때를 회고했다. 김의 특기는 허리안아넘기기. 특히 정신력이 강하다는 평.
이어 지난4월 LA올림픽선발전에서 라이벌 안대현(안대현·한국체대)을 꺾고 대표선수로 복귀한 김은 17일LA에 도착한후 웬일인지 시차를 빨리 극복, 몸이 가볍고 힘이 샘솟듯 했다고 훈련상황을 설명했다.
태릉선수촌에서 5백일간의 강훈으로 평소 67kg이던 체중이 62kg으로 무려 5kg이나 줄어들었고 체력이 자신도 모르게 좋아진것을 첫날 경기에 출전하면서 느꼈다고 했다.
김은 『이제는 숙원을 풀였다. 앞으로 체육교사가 되어 평생을 가난속에 고생한 늙으신어머님올 모시고 살겠다』고 울먹였다. 김은 금메달을 땀으로써 체육진흥재단과 레슬링협회가 주는 경기력향상연금 1백20만원을 평생 매달 받게된다.
3남3녀의 형제중 둘째형은 서울서 직장에 다니며 누나 셋은 출가해 김의 집은 어머니정씨와 형원산씨부부조카등 7식구.
재산이라곤 논 6마지기와 방4개짜리 18평 슬레이트집한채가 전부. 농사수입과 형원산씨가 받는 월16만원의 월급으로 생계를 꾸리고있다.

<김원기 신상명세>
▲생년월일=1962년1월6일생
▲본적·주소=전남함평군대동면백호리보화촌
▲학력=함평월송국교·함평중·함평농고·전남대·상무(현국군체육부대)
▲체격조건=169cm·62kg
▲가족상황=홀어머니 정일례씨(64)의 3남3녀중3남
▲혈액형=A형
▲특기=허리안아넘기기
▲국제대회경력=84년 스웨덴 메라컵6위감격의 기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