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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그리스가 그리 부러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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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정재
논설위원

나쁜 역사나 못난 이웃은 내게 교훈이 된다. 지난 한 해 대한민국은 일본화(Japanization)에 시달렸다. 저성장·저물가에 많은 나랏빚…. 대통령부터 경제부총리까지 ‘잃어버린 20년’ 운운하며 겁을 줬다. 그래 봤자 달라진 건 없었다. 20년 내내 잔뜩 비웃던 일본이 부활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시기심 짙은 무력감에 시달린 게 고작이다.

 올해는 아무래도 그리스일 것이다. 예단컨대 그리스화(Hellenization)란 말이 일 년 내내 대한민국을 괴롭힐 것이다. 공무원 연금 개혁이 이렇게 물 건너가는 것을 보며 그리스를 떠올린 이는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맹탕, 하나마나 개혁’을 위해 대통령은 날마다 ‘개혁’ 노래를 불렀고 국민은 기대 반 의심 반 지켜봐야 했나.

 그리스는 왜 망가졌나. 아테네 올림픽 적자를 꼽는 이도 있고 실력 없이 해치운 화폐 통합, 만연한 부패와 비리를 꼽는 이도 있다. 따져보면 딱히 “이거다” 꼬집을 건 없다. 언론이나 경제 전문가는 ‘과잉 복지’가 핵심이라고 지적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특혜 복지’가 더 문제였다. 그 중심엔 공무원이 있다.

 그리스가 세계 금융위기에 휘말리기 직전인 2007년 국내총생산(GDP)에서 사회복지 지출에 쓰는 돈은 ‘고작’ 20.6%였다. 우리(지난해 10.4%)보다는 많지만 당시 프랑스(34.9%)·영국(25.9%)은 물론 유럽연합 27개국 평균 26.9%에 한참 못 미친다. GDP의 3분의 1을 복지로 쓰는 북유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복지 과잉 때문에 그리스만 망했다는 말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명제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게 공무원이다. 그리스는 다당제 국가다. 사회당·신민주당·공산당·그리스정교회연합·급진좌파연합 등이 의석을 나눠 먹는다. 선거 때마다 판세가 달라진다. 오랜 정치 혐오로 대선 투표율이 50%를 밑돈다. 이런 구조에선 세력·조직화된 투표권자를 잡는 쪽이 승자가 된다. 확실한 투표권자가 누군가. 공무원이다. 그리스 정치권은 공무원 표심 잡기에만 열을 올렸다.

 덕분에 그리스 공무원의 ‘과잉 복지’는 세계 최고 수준이 됐다. 오전 8시30분 출근, 오후 2시30분 퇴근한다. 워낙 지각 출근자가 많아 제시간에 출근하면 ‘정시 출근 수당’을 받았다. 85만 공무원에게 주는 월급이 GDP의 50%가 넘는다. 노동인구 열 명 중 하나가 공무원이다. 영국의 5배다. 1년에 14개월분 월급을 받고 최소 한 달 유급 휴가를 즐길 수 있다. 58세면 퇴직해 재직 때 월급의 98%만큼 연금을 평생 받는다. 그리스가 고복지 국가로 일컬어지게 된 건 순전히 이런 ‘황제 연금’을 받는 공무원들 때문이다. 이런 혜택은 일반 국민에겐 돌아가지 않는다.

 유럽연합과 국제통화기금(IMF)이 괜히 그리스에 구제금융을 주는 조건으로 공무원 수와 연금을 줄이라는 게 아니다. 공무원의 ‘황제 복지’를 놔두고는 그리스에 돈을 줘 봤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란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이런 구조·연금 개혁 요구를 가혹하다며 거부하고 있는데 그 중심엔 물론 공무원 세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나라가 공무원과 일반 국민으로 갈려 서로 “네 몫부터 줄여라”며 다투느라 날을 지샌다.

 우리는 다르다고? 하기야 공무원 수 110만 명은 노동인구의 6%로 그리스를 밑돈다. 국민 일인당 고혈을 좀 덜 짜내도 공무원 ‘봉양’이 아직은 가능하다고 우길 수 있다. 그리스 공무원 같은 ‘황제 복지’도 아니니 비교 대상으로 삼는 게 옳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게 떠드는 이들, 돌아보라. 반면교사란 말이 왜 나왔겠나. 흉보면서 닮지 말라고 나온 것이다.

 하기야 돈 있고 곳간 넉넉하다면 ‘황제 복지’ 아니라 ‘신의 복지’인들 무슨 문제랴. 현실이 안 받쳐주니 문제인 것이다. 지난 대선 때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선심 쓴 무상시리즈 덕분에 그냥 놔둬도 20~25년 후면 대한민국은 그리스보다 고복지 지출 사회가 된다. 어제 무산된 개혁안 대로라면 공무원 연금에만 70년 동안 혈세 1654조원을 쏟아부어야 한다. 가난한 국민이 공무원 노후 봉양하려다 허리 휘기는 그리스나 우리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얘기다. 이래도 ‘그리스화’가 남의 얘기란 말인가.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