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삼성화재배세계바둑오픈] 유창혁의 직관, 이창호의 부동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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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제10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32강전 하이라이트>
○ . 유창혁 9단 ● . 이창호 9단

모든 것은 '계산'으로 귀결된다. 사업이든 정치든 바둑이든 일단 계산서를 정확하게 뽑을 수 있는 사람은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판세는 막막하고 변수는 끝도 없으니 손익과 방향을 계산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이럴 때 등장하는 단어가 '직관'이나 '감각'이다. 판단이 어렵지만 마냥 머뭇거릴 시간이 없으므로 몸이 시키는 대로 간다. 직관에는 오랜 경험과 성격, 그리고 인생관이나 우주관도 녹아있다. 운명을 만들어내는 참 신비한 존재다.

장면 1=넓고 막막한 바둑이다. 이창호 9단이 75로 붙여본 것은 진로를 정하기 전에 반응을 보려는 것이다. 유창혁 9단은 76으로 상변을 쭉 뻗었다. 동문서답이요, 결단의 한 수다. 77로 두 점이 떨어져 나간다. 이쪽과 76은 어느 쪽이 클까. 계산 불능이다. 이걸 계산할 수 있다면 바둑의 신이라 할 만하다. 유창혁은 직관으로 76을 선택했을 뿐이다.

이제 흑은 중앙 삭감이 화급해졌다. 이창호 9단의 진격로는 과연 어디일까.

참고도=검토실에선 흑 1 부근이 다 선수니까 3까지 갈 수 있고(백A의 건너붙임이 안 된다) 이 수를 기반으로 위쪽 중앙으로 파고들 것이라고 예상한다. 흑 1은 백 2가 껄끄러워(아래 흑집도 엷어진다) 막상 두기는 겁나는 수지만 이창호니까 좋은 수순을 찾아낼 것이라고 한다.

장면 2=이창호는 과연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는 83으로 살짝 모션을 취했을 뿐 B조차 두지 않았다. 88이 놓이는데도 그냥 바라보며 전혀 초조해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87을 두어 자신의 집을 지켰다. 국면은 지극히 모호한데 이 상황에서 이런 자제력이 어찌 가능한 것일까.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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