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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락주의-철학이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재미나는 통계를 보았다.
미국학생들은 75·3%의 다수가내세를 믿는 반면, 한국학생들은 34·7%만이 내세를 믿고43·2%는 모르겠다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식자간에는 오늘의 향락주의적 사회풍조를 이러한 통계와 연결시켜 생각해 보려고 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현세 현실주의의생활습관은 유교의 현세중심주의의 영향이 컸다고 볼수있다.
사실 내세가 문제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고전적 철학은 대부분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사색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플라톤」의 철학도 결국 도피가 불가능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발생했다.
그는 육체의 죽음 때문에 영원불멸한 「이데아」를 생각해냈고, 이「이데아」에 도달하기 위하여 육체적·감성적 생활을 배제했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적 금욕의 윤리생활에 한계가 있다.
인간의 자력은 그만큼 약한것이다.
따라서 전지전능하고 절대자인 신이 요청되고 신의 용서에 의하여 천상의 나라에 가기를 원하게 되었다.
그로인하여 자력적인 문리생활의 약점을 보완하려 했다.
그러나 천상의 나라에 간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심판을 내리고 그시기도 죽음과 동시이다.
따라서 소명의 긴장이 죽음을 극복한다.
불교도 역시 죽음의 극복에서 출발한다.
「고오다마·싯달타」의 사문유관의 출가동기가 바로 그것이다.
불교에서는 정신과 육체, 둘로 나누어 보지 않지만, 그러나 인간의 주인공은 육체가 아니라 마음(칠)이라고 한다.
또 육체는 사멸되지만 영혼은 윤회한다고 본다.
이 고해의 영혼윤희에서 해탈하는것을 이상으로 삼고 죽음을 극복한다.
성리학에서는 이기론적 입장에서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기로서 없어지지만, 그 이는 영원하여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살아있는 자손의 일금지성의 제사로 감동할수 있다는 것이다.
어버이가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그 자손이 살아계신듯 정성스럽게 모시고 제사를 예로써 다하면 곧 살아있는듯 감동한다는 것이다.
불교, 기독교, 「플라톤」의 철학이 개체의 자유의지를 통하여 죽음을 극복하지만 성리학은 자손이 혈연 공동체의 제례를 통하여 죽음을 극복한다.
이와같이 일염지성의 공경과 경건의 향내적 경향의 유교가 향락주의와 악수할수 있을까?
결국 철학의 부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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