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한일회담(22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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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내가 박정희대통령의 지우를 얻게된 것은 64년 5월초였다. 박상길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이 찾는다는 전갈을 해와 자유당 정권이후 4년만에 처음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그해 1월 대한무역진흥공사사장이 되어 뉴욕에서 열린 박람회에 갔다온 뒤 낸 사소한 건의와 관련한 용건이었다. 대통령집무실에 들어서니 박충훈 상공장관과 세계일주 후 인사차 들른 엄민영씨 (후에 내무장관 역임)가 있었다.
박대통령과의 첫 대면이었다. 야무진 얼굴에 매서운 눈초리, 국가재건에 대한 불타는 집념이 그로부터 내가 받은 최초의 강렬한 인상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박대통령은 나의 손을 잡고 『당신이 김동조씨군요』하며 나에 관해 이미 많이 들었다는 투로 운을 뗐다. 나의 건의는 별게 아니었기 때문에 간단히 끝났다.
박대통령은 엄민영씨와 나에게 점심을 내면서 이것저것 물었다. 엄씨가 해외공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지금의 공관능력으로 보아 한일회담의 타결이 우려된다』고 비판했다.
이에 전직 외무차관으로 외교관들을 변호치 않을 수 없어 나는『외교관은 외롭다. 특히 본국 정부의 신임이 없으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고 말하고 『엄선배 말처럼 지금 방식으로 한일회당을 계속한다면 대단히 어려울것』 이라고 덧붙였다.
박대통령은 『그렇다면 한일회담을 어떻게 해야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제가 지난해 말「사또」전 일본수상을 만난 결과를 보고서로 만들어 박덕수선생 (당시 한국반공연맹이사장· 박대통령의 은사)를 통해 각하께 올렸는데 보셨느냐』고 먼저 말을 꺼낸후 나의 소견을 말했다.『금-「오오히라」니메모로청구권 문제는 방향이잡혔고 원·적성 농상회담으로 어업문제도 진로가 잡혀가고 있어 남은문제는 기본권 관계등과 청구권 어업문제의 기술적 문제서 여하히 매듭짓느냐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심하고 달려들면 못할 것이 없지만 이 문제로 국내가 시끄러워 실무자로서는 이럴 때일수록 정부의 절대적 신임과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과연 그런지는 의심스럽습니다. 또 한일회담은 국내의 격심한 반대투쟁을 불러일으키고있는 만큼 국내정치를 의식하는 사람을 대표단에 참여시켜서는 안될 것으로 압니다』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올린 「사또」면담 내용을 참고토록 박대통령께 진언했다. 그 내용은 허술하겠지만 한일회담과 관련해서 나는 기록을 갖고 있다.「사또」 씨는 64년 가을 「이께다」 수상의 와병으로 인한 수상직 사퇴에 따라 후임수상이 되어 한일국교 정상화를 이룬 장본인이다.
그는 또 「기시」 (안우개) 전수상의 실제이기도 하다 나는 57년 봄 외무부 정무국장으로 「기시」 수상을 비밀리에 예방, 한일회담에 관해 담론한 일이 있는데, 63년 11월 초순 동경에서 그의 동생이자 1년후 수상이 된 「사또」씨를 만나 한일회담에 관한 그의 구상을 들을수 있었던 것은 확실히 기록이랄 수밖에 없다.
형제재상을 만날 수 있게해 준 장본인은 두번 다 「야쓰기」씨였다. 나는 63년10월말 사이공에서 열린 아시아 반공연맹회의에 한국대표 (당시 한국반공연맹 사무총장으로 있었음) 로 참석후 「고·딘·디옙」 대통령 정귄이 전복되던날 사이공을 떠나 홍콩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사이공에서 헤어진 일본대표단의 「야쓰기」씨를 다시 만났다.
「야쓰기」 씨는 「사또」 씨가 「이께다」 수상의 뒤를 이을 강력한 정계지도자이니 이번에 동경에 들러 그를 만나보는게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며 내게 권유했다. 그래서 그의 주선으로 「사또」 씨를 만나게 됐던 것인데, 나도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한일회담에 한발한발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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