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2040년 생일에 운전면허를 반납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강인식
강인식 기자 중앙일보 기자
강인식
사회부문 기자

백화점에서 옷을 골랐는데 원하는 사이즈가 없다. “고객님, 명동점에 재고가 있으니 커피 한잔 드시고 계시면 물건이 도착할 겁니다”라고 직원이 말했다. 원하는 사이즈를 가져다줄 이는 아버지뻘 어르신일 것이다.

 낮에 지하철을 타면 백화점에서 백화점으로 쇼핑백을 나르는 노인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지하철만 이용한다. 만 65세 이상에겐 운임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쇼핑백 하나에 3000원인 걸 감안하면 무임승차는 ‘쇼핑백 나르기’를 정착시킨 가장 큰 힘이었다.

 하지만 쇼핑백 나르기는 지속되기 힘들 것 같다. 최근 서울시는 지하철 요금 인상안을 발표하며 무임승차로 인한 손실을 강조했다. 지난해 지하철 무임승차는 2억 건을 넘었다. 손실은 2880억원. 몇 년 안에 무임승차는 무상급식 못지않은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나는 2040년에 65세가 된다. 그때가 되면 인구의 3분의 1이 고령자로 채워진다. 그땐 이미 무임승차가 먼 옛날 일이 돼 있을 것이다.

 원하는 옷을 기다리며 ‘2040년 이후의 세상은 내게 가혹한 곳이 될지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65번째 생일에 전화벨이 울린다. “어르신 성함이 강, 인자, 식자 되시죠?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으면 3년간 면허를 연장할 수 있으세요. 면허를 반납하시면 매달 교통 쿠폰 30장을 받을 수 있으시고요.”

 안전을 위해 고령자의 운전을 제한하는 건 세계적 추세다. 80대 택시기사가 신라호텔 로비로 돌진하는 사고가 발생한 후 국내에서도 ‘실버 운전’에 대한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나이와 교통사고의 비례 관계를 보여주는 수치와 함께.

 선진국에선 20~30년 전부터 고령자 운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그래선지 1990년대 미국 드라마엔 실버 운전이 종종 소재로 쓰였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신경계 문제로 사고를 일으킨 노인 이야기. 우람한 픽업트럭은 노인의 강건함을 보여주는 증표와 같았다. 생계를 위해, 아픈 부인을 위해 노인은 운전했다. 운전은 그의 자존감 같은 것이었다. ‘더 이상 운전할 수 없다’는 진단을 전하기 위해 의사가 고민하고, 가족과 이웃이 슬퍼하는 모습. 그런 고민을 눈치채고 쿨한 척 받아들이는 노인. 그런 내용이었다.

 언젠가 무임승차는 사라지고 고령자 운전은 제한될 것이다. 다만 그때 우리 각자의 태도가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의 태도와 같을지는 모르겠다. 커피 한잔을 비울 때쯤 원하는 사이즈의 옷이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쇼핑백을 배송한 아버지뻘 어르신은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강인식 사회부문 기자

▶ [분수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