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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욕하면 돈 번다" … 우경화, 아베 넘어 일본 전체의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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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3일 일본 시장에 선보이는 갤럭시 S6와 S6 엣지 스마트폰에선 ‘삼성’이란 로고를 찾아볼 수 없다.

 제품 앞면과 뒷면, 아니 홈페이지에서도 삼성을 뺐다. TV 광고도 마찬가지. ‘삼성 갤럭시 S6’가 아닌 ‘도코모 갤럭시 S6’ ‘au 갤럭시 S6 엣지’로 소개한다. 도코모와 au는 일본 1·2위의 이동통신사다. “일본 시장의 특수성을 감안한 조치”라고 하지만 정작 S5까지는 이러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이유는 뭘까. 업계 관계자는 “2013년 8월 도코모가 갤럭시를 ‘전략 라인업’에서 제외한 배경에는 일본 정부의 입김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때와 국면이 또 달라졌다”고 분석했다. 일본 정부가 한국 제품을 견제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냥 보통 일본 국민도 한국 제품이라고 하면 꺼리는 상황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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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자칭 ‘지한파 지식인’이라고 했던 이들의 변신은 괄목할 만하다. 대놓고 ‘한국 때리기’의 선봉에 서 있다.

 한국에서 공부했거나 근무 경험이 있는 학자·언론인 상당수가 저서나 TV 출연을 통해 “한국은 우리(일본)와 같이할 수 없는 나라”란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지난 한 해 동안 신서 논픽션 부문 1위에 오른 ‘바보 같은 한국’이란 의미를 담은 『매한론』을 쓴 이도 지지(時事)통신 서울 특파원 출신이다. “한국을 조지면 돈을 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얄팍한 장삿속에 너나 할 것 없이 ‘한국 욕보이기’의 선봉에 서는 양상이다. 도쿄의 한 서점은 ‘너무 이상한 나라, 한국’이라는 코너를 마련해 혐한 서적들을 진열하고 있다.

22일 춘계 예대제(제사)를 맞아 일본 초당파 의원연맹 소속 국회의원 106명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도쿄 AP=뉴시스, 중앙포토]

 2013년 12월 일본 정부가 전후 최초로 ‘국가안보 전략’을 작성할 당시 한국을 ‘자유·민주주의·기본적 가치관을 공유한 국가’에서 빼고 ‘우선적 파트너 국가’의 등급도 호주·인도 밑으로 낮추자고 주도한 인물 역시 지한파 인사였다. 뚜렷한 역사관이 없는 대다수 일본 국민은 이를 스펀지처럼 그대로 수용했다. ‘재팬 이즈 넘버원’의 시대를 경험한 40~60대의 ‘자존심 세대’는 혐한(嫌韓) 책으로 몰리고, ‘돈이 없는’ 20~30대는 ‘네토우요(인터넷 우익의 일본어 약칭)’에 자신들의 플랫폼을 형성했다.

 야마구치 지로(山口二郞) 호세이(法政)대 교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한국 때리기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이에 공감하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전후 70년이 지나면서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소수 세력이 됐는데, 일본 국민이 당연한 사실과 상식을 제대로 후세에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 원인을 분석했다. 일 주요 언론사의 한 간부는 “독일의 경우 국제재판(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범을 처벌한 뒤 국내법적으로도 명백하게 매장을 시켰지만 일본은 그렇지 못했다”며 “이에 따라 ‘국내법적으로 도쿄 재판의 전범들은 범죄자가 아니다’는 우익의 주장이 전쟁을 겪지 않은 20~60대에게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서점 판매대. ‘너무 이상한 나라, 한국’ 코너에 『가깝지만 먼 게 좋은 일본과 한국』 등의 혐한 서적을 모아 놓았다. [도쿄 AP=뉴시스, 중앙포토]

 게다가 일본이란 국가 자체가 쇠퇴 국면에 들어서면서 장래가 불안해지자 자기중심적 사고에 갇히고 ‘만만한’ 이웃 나라를 몰아세우는 추세가 현저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아사히(朝日)신문과 산케이(産經)신문의 부수 변화는 시사적이다.

 아사히는 지난해 8월 제주도에서의 위안부 강제연행을 증언했던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사망)와 관련된 과거 기사를 취소하고 오보임을 인정했다. 이를 빌미로 우익지 산케이는 연일 아사히와 한국을 싸잡아 공격했다. 그 직후 아사히 부수는 지난해 9~10월 사이 20만 부 줄어든 반면 산케이는 6만 부, 같은 ‘아베 지지 신문’의 요미우리(讀賣)는 12만 부 늘었다. 일반 국민의 ‘우경화’ 흐름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다 보니 아베 정권의 ‘언론 옥죄기’가 노골화되는데도 이를 반박하거나 매섭게 비판하는 여론은 거의 없다. 집권 자민당은 지난 17일 보도 프로그램 중 진보 성향의 한 출연자가 총리관저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민간 방송국인 TV아사히 전무를 불러들였다. 전대미문의 일이다. 관할 부처인 총무성도 아닌 집권당이 언론사 간부를 소환한 것이나 그렇다고 이에 응하는 언론사 모두 비정상이다. 심지어는 지난 3일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가 정례 기자회견에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보류 이유를 묻는 홍콩 기자에게 “(일본은) 중국과 달리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국가이니 즉시 붙잡혀 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마음껏 조롱했지만 이를 문제 삼은 일본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삼성 로고가 빠진 갤럭시 S6 엣지. [도쿄 AP=뉴시스, 중앙포토]

 일본 언론의 변질은 한·일 간 역사인식 문제에서도 드러난다. 미우라 마리(三浦まり) 조치(上智)대 교수는 “일본 언론은 그 깊숙한 배경을 보지 않고 상대방(한국)의 반발만 보도하기 때문에 일본 내 내셔널리즘의 확산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즉 최근 2~3년간 현저화되고 있는 일본의 우향우 현상은 단지 ‘아베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전체의 문제’다. 바꿔 말하면 아베만 총리에서 물러나면 일본이 원래대로 돌아오거나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점이다.

 특히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사회 일선에서 물러나고 아베와 마찬가지로 “왜 우리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또 비난받아야 하느냐”는 사고를 지닌 전후 세대가 정계·재계·학계·언론계 등 사회의 확실한 중추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현 흐름을 되돌리기 힘든 이유다.

 20년 넘게 일본을 지켜본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일본이 변하고 있다’가 아니라 ‘일본은 변했다’가 맞다”고 말했다. 야마구치 교수는 “전후 50년을 맞은 20년 전(1995년)만 해도 일본에는 상식이라는 게 있었는데 20년 만에 바보가 되고 말았다”고 한탄했다.

 일본 정치권의 역학구도 변화 또한 한국에는 비관적이다. 당장 자민당의 차기 주자로 거론되는 이들 모두가 9월의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의 재선을 표명하고 있다. 게다가 제1야당인 민주당도 당내 진보세력이 뒷전으로 물러나며 현 대표인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정도를 제외하곤 모두 사상적으로 자민당에 가까운 인사들이 ‘차기 후보’로 포진하고 있다. 설령 수년 후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진다고 해도 현 아베 정권과 그다지 큰 변화가 없을 것이란 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luckym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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