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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 장항선 '세월 더듬기'

중앙일보

입력

장항선 이설공사가 한창이다. 내년이면 굽은 철길이 곧게 펴진다. 그러면 지금의 모습은 사라질 게다. 그 위를 달릴 수도 없을 게다. 장항선을 탄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철길을 더듬는다.
장항선. 천안과 서천군 장항을 잇는 길이 143.1km의 단선 철도. 1931년에 전 구간이 개통되었으니 나이도 어느덧 일흔 다섯 살이다. 그런데 지금 장항선이 '수술'을 받고 있다. 장항선 개량화 사업에 따라 곡선부분이 곧게 펴지고 있다. 내년 말에는 거의 모든 공사가 끝날 계획이다. 철길도 장항을 지나 군산까지 연결된다. 그 때가 되면 지금의 장항선 모습을 보기 힘들 게다. 당연히 기차를 타고 달릴 수도 없을 게다. 초대형 테마 쇼핑몰로 변해버린 용산역처럼 장항선도 말끔해질 것이다. 이것이 지금 장항선을 타는 이유다.

장항선은 곡선구간이 많다. 마치 노인의 연약한 허리처럼. 천안.온양.도고.홍성.예산.대천.광천 등 이름 난 도시 뿐아니라 선장.원죽.삼산 등 작은 마을까지 둘러 가다보니 철길의 모양이 자연스레 휘었다.

"기차가 깨긋해졌네. 전에는 지저분하더니만." 좋다는 말인지, 아쉽다는 말인지…. 뒤쪽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주머니의 무심한 소리. 정말 그렇다. 장항선의 '수술'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 위를 달리는 기차가 변했다. 파란색 비둘기호가 사라진지 오래다. 초록색 통일호도 없어졌다. 무궁화호와 새마을호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장항선 기차는 용산역에서 하루 열 번 출발한다. 새벽 5시30분 첫차를 시작으로 무궁화호 일곱 번, 새마을호가 세 번 장항으로 떠난다. 4시간이면 도착이다. 6~7시간 걸리던 것은 그야말로 옛일이 됐다. 천안을 지나면서 복잡한 전철용 전선들이 사라졌다. 장항선에 진입한 것이다. 무궁화호가 달린다. 사라져 버릴지 모를 철길을.

빨라져서 좋긴 한데 할아버지.할머니는 '최첨단' 시설이 불편한가 보다. 꽉 닫혀 버린 문 때문에 할아버지는 애써 담배를 참는다. 할머니는 자동문 앞에서 멈칫거린다. 버튼을 눌러야 문이 열리는데, '고놈'이 대체 어디에 붙었는지 보이질 않는단다. 비둘기호는 객차 창문도 열리고, 객차와 객차 사이의 문도 마음대로 열 수 있었는데…. 할아버지.할머니는 문고리 돌리면 문 열리던 기차가 좋단다.

기차에 오른 사람들 대부분의 차림새가 단출하다. 요즘은 택배를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여객전무가 귀띔해 준다. 휘청휘청 돌아가던 선풍기 대신 에어컨과 히터, 평평한 2인용 의자 대신 한 사람씩 구분된 의자…. 모두 옛것이 돼 버렸다. 의자에 서너명씩 끼어 앉고, 선 채로 뒤죽박죽 뒤엉켜 버린 사람들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살과 살의 부대낌은 사라졌다. 사람은 줄고. 기차는 단정한 모습이다.

기차 안에도 사람이 있고, 기차역에도 사람이 있다. 청소역(옛 진중역)은 광천역과 주포역 사이에 있다. 녹색 지붕과 베이지색 외벽, 작은 출입구…. 기차를 타기 전 생각했던 소담한 역사다. 내렸다 다음 기차를 타기로 한다. 장항선에는 원죽역처럼 역무원이 없는 역이 있는가 하면 삼산역이나 오가역처럼 역으로서의 구실보다 기차 교행을 위해 들어서 있는 역이 있다. 장항선은 단선이라 상하행 기차가 교차하기 위해 이런 역들이 필요하다. 그러고 보면 청소역은 꽤 큰 편이다. 여섯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하루 5~6번 기차가 멈추니 말이다. 이곳에 내린 사람들은 오서산에 오르거나 오천항 나들이에 나선다. 홍성역에서 근무하던 박형구(36)주임이 이곳에 온지는 3개월. 그는 역이 작아서 좋단다. "마을 사람들이 마실 댕기러 와유. 역 앞에 식당 아줌마두 오구유, 요 앞에 택시기사 아저씨들도 가끔 커피 마시러 와유. 멀리 가는 사람들은 농사 지은 거 쬐끔씩 주고 가기도 해유. 고생한다면서. 그러면 저도 좋은 자리 잡아 줄려고 하쥬. 아직은 정이 남아 있지유. 자주 왔다갔다 하시는 분들은 잘 알아유."

기차는 대천을 지나고 웅천.서천을 통과한 뒤 종착지인 장항역에 도착한다. 장항역 김진석(55)계장이 서울서 온 객을 맞는다. "아구찜 한 번 드셔 보셔유. 서천 8경 구경해도 좋고." 장항역 대합실은 동네 어르신들 차지다. 시간이 날 때면 이곳에 모여 옛날 이야기를 하곤 한다. 가끔은 사라진 비둘기호, 올라 버린 기차요금이 화제가 되기도 한다. "옛날에 비둘기호는 1000원이었시유. 서울까지 가는데 말이유. 요즘은 1만원이 넘잖유? 비둘기호 없어진 뒤로 기차 잘 못타유. 비둘기호.통일호는 왜 다 없어졌디야. 싸고 좋았는디. 통일호.무궁화호.새마을호 다 보내고 가믄 서울까지 예닐곱시간은 걸렸시유. 그래두 비둘기호가 좋았다니께."

서해안 고속도로가 생기고, 택배가 발달하고, 자동차가 많아지고, 시골 사람들이 줄면서 장항선은 잊혀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장항선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기차는 정(情)을 싣고 장항까지 오간다. 기차 타고 떠나는 여행은 그래서 따뜻하다. 한 겨울 한기를 녹일 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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