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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1세대 번역가 안정효 "허튼 짓은 인생의 낭비가 아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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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은평구에 있는 자택 거실에서 자서전에 넣을 자료를 검토하고 있는 안정효씨. 뒷면 책장에 꽂힌 책들은 지금껏 안씨의 손을 거쳐 출간된 번역서 128권이다. [김경록 기자]

“고등학교 2학년 때 외삼촌이 영어 교과서를 꺼내오라 하는 거야. 한번 해석해보라는데 도통 알 수가 없더라고. 그 문장이 뭔가 하니, ‘I like it here(난 여기가 좋다)’이었어. 모른다 그랬다가 꿀밤을 세게 맞았지.”

『하얀 전쟁』 작가의 허튼짓 예찬 #
"길 헤맨 만큼 경험이 늘었잖아"

 소위 ‘가목적어 it’의 용법을 몰라 얻어맞은 이 고등학생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 1세대 번역가 안정효(74)씨다. 안씨는 서강대 영문과 재학 시절인 1964년부터 번역을 시작해, 그의 손을 거친 번역서만 150권이고 출간된 건 128권에 달한다. 자신의 소설 『하얀 전쟁』과 『은마는 오지 않는다』를 직접 영어로 옮겨 미국에서 출판하기도 했다. 만화가를 꿈꾸다 영문학도가 됐고, 베트남 전쟁 종군기자를 거쳐 번역가이자 소설가로 자리매김한 안씨는 자신의 삶을 “거꾸로 인생”이라 표현했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갈 때, 나만의 길을 찾으면 경쟁할 필요도 없이 일인자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영화 보고 만화 그리기에 빠져 있던 ‘할리우드 키드’

“학교 밖에 있을 때는 친구들이랑 몰려 다니면서 영화 보는 데 빠져 있고, 교실에선 수업 시간에 몰래 만화나 그리고 있었지. 공부는 완전히 뒷전이었고.”

 그의 파란만장한 청소년기는 자전적 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 묘사된 그대로다. “영화도 정상적으로 방과 후에 돈 내고 본 게 아니야.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수업이 있는 날은 그냥 학교 담 넘어서 도망가는 거야. 극장도 화장실 창문 같은 데로 몰래 숨어 들어가고. 같은 영화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반복해 보다 서너 시간 지나서야 교실로 돌아왔지.”

안씨가 학창시절 정학을 두 번 받은 것도 영화관에 출입하다 걸려서였다. “그땐 학생이 영화 보다 걸리면 무조건 정학이었다고. 심지어 고등학교 2학년 때 정학 받았을 때 본 영화는 ‘풍운의 젠다 성’이라는 청소년 고전 영화야. 억울했지만 어쩌겠어.”

 영화를 보며 마음에 쌓아둔 수많은 스토리는 만화로 풀어냈다. 수업 시간이면 몰래 공책에 만화를 그리는 게 일이었다. “한 작품당 무려 1500쪽짜리 장편 만화를 그리는 거야. 중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나의 3대 장편 만화를 완성했지.” 수업 시간에 몰래 그린 안정효의 ‘3대 장편 만화’는 공책 한 권씩 완성될 때마다 대출 장부를 만들어 관리할 만큼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직접 그린 만화를 들고 종로구 관철동이나 신촌역 앞에 쫙 늘어선 만화 잡지사를 찾아가 원고료 받고 팔기도 했다. “난 한번 마음 먹으면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근성이 있거든. 이 시절 내 꿈은 오직 만화가였어. 그러니 밤낮 만화만 그린거야.”

대학에서 찾은 새로운 꿈, 영어 소설가

영문과에 진학한 건 친구의 우연한 조언 한마디 때문이었다. “적성 검사니, 진로 교육이니 이런 게 어딨어. 고등학교 3학년이 됐는데, 어느날 강인모라는 친구가 ‘정효 너는 머리가 좋으니까 미대 말고 다른 과에 가라. 서강대라는 곳이 새로 생겼는데, 영어 잘하면 유학도 보내준다더라’ 이러면서 문제집을 빌려주더라고. 생각해보니 만화는 언제든 그릴 수 있는 건데, 유학도 갈 수 있다니 정말 근사하잖아. 그래서 영문과 가려고 공부를 시작했던 거야.”

 남들은 고등학교 3년 내내 하는 대입 준비를, 안씨는 고3 올라가 몇 개월 만에 벼락치기로 끝내고 서강대에 합격했다. 막상 합격하니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영어 점수가 어떻게 잘 나오긴 했지만 고등학교 때 공부를 안 했으니 다른 애들보다 기초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도시락 싸가지고 날마다 도서관 가서 책을 읽어댔어. 학교 도서관에 한글 책은 얼마 없고 외국 원서들뿐이라 원서도 가져다 읽었지.”

 한번 손에 잡으면 뿌리를 뽑는 근성은 이때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남들 다 노는 여름방학 때도 안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도시락을 싸들고 원서 읽기를 계속했다. 원서 읽기는 자연스럽게 영어 소설 쓰기로 이어졌다. 당시 서강대 교수는 외국인 신부가 대다수였다. 안씨가 방학 때도 도서관에 앉아 매일 책을 읽고 메모하자 이 외국인 교수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뭐하냐고 자꾸 묻기에 ‘I’m writing a story(소설 쓰고 있다)’라고 답했지. 그랬더니 다 쓰면 보여달래. 아마 단편소설 쓴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난 한번 펜 잡으면 무조건 장편이거든. 개학할 때쯤 12만 단어짜리 장편소설을 써서 들고 갔더니 엄청나게 놀라더라고.”

 이때부터 안씨는 서강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이 됐다. “교수님들이 날 천재라고 치켜세우는 거야. 소설 쓸 때 사용하라며 그 귀한 타자기를 선물해주기도 했어. 내가 쓴 글은 교수님들이 가져다가 미국 출판사에 직접 보내서 등단시켜주려고 엄청나게 애쓰셨지.”

 안씨는 대학 재학 시절에 영어 소설을 7권 완성했다. 1987년 출간한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초고도 대학교 3학년 때 쓴 영어 소설이었다. “이때는 정말 금방이라도 영어 소설 작가로 등단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근데 졸업할 때까지 책을 내주겠다는 미국 출판사가 나타나질 않더라고.”

 영어 소설가의 꿈은 실패한 듯 보였지만, 갈고 닦은 실력은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영어로 소설을 쓸 만큼 대단한 인재’란 소문이 퍼지자 유명한 문화 잡지 ‘펜클럽’의 백철 회장이 그를 찾아와 한국 단편소설의 번역을 의뢰했다. 이때부터 번역가에 길에 들어선 거다. 4학년 되자 영자 신문사인 코리아헤럴드 문화부장이 찾아와서 기자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스카우트 제안을 했다. 풀브라이트재단 장학생으로 뽑혀 미국 유학을 앞두고 있던 안씨는 이때 기자의 길을 택한다.

"고교 땐 만화만 그렸고, 대학 땐 영어 소설만 썼지
유학 기회 잡았지만 베트남전에 갔고...기자 하다 번역가의 길 걸어
난 거꾸로 인생, 남들과 다른 나만의 길 찾으면 일인자 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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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종군기자에서 『하얀전쟁』 소설가로

안씨는 취업하고 얼마 안돼 입대를 해야 했다. 군대에서도 출중한 영어 실력 덕분에 참모총장실 비서로 복무하다 베트남 전쟁 통역병으로 자원해 전쟁터로 떠났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종군기자로 활약한 어니 파일이라는 사람을 정말 좋아해서 언젠간 꼭 종군기자로 일해보려는 꿈을 갖게 됐거든. 어차피 영어 소설가 되기는 틀렸다고 생각해서 다른 꿈을 찾은 거지.”

 그는 베트남에서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한국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만들어 배포하는 군 홍보병이었다. 그는 홍보병 업무와 동시에 자신이 소속된 코리아헤럴드는 물론, 사이공데일리뉴스·사이공페이퍼 등 베트남 언론사와 미국 언론사 등에 자신이 직접 쓴 기사를 송고하며 종군 기자로도 활약했다.

 안씨는 베트남에서 3년을 지내면서 전쟁의 참상을 두루 목격했다. “사람들은 전쟁이라고 하면 참혹하고 비인간적이라고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전쟁은 오히려 인간성이 폭발하는 곳이야. 전투 중에 아군이 옆에서 죽기도 하는데, 그럼 전투 끝나고 시신 끌고 오면 되잖아. 근데 총알이 날아오는 걸 뚫고 그 시신을 가지러 간다고. 그 와중에 셋이 더 죽어. 그걸 보고 누구도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맞아, 이런 게 바로 인간이야’라는 생각이 터져 나온다고.”

베트남 전쟁 당시, 작전에 투입돼 헬기에 탑승하기 직전의 안정효씨.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 『하얀 전쟁』이나 6·25를 다룬 『은마는 오지 않는다』 같은 작품을 쓴 안씨는 문단에서 ‘반전(反戰) 작가’라 불리기도 한다. 안씨는 “전쟁에 반대한다는 생각으로 그런 소설을 쓰지 않았어”라고 말한다. “난 오히려 전쟁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국가 안에서도 나쁜 사람이 있으면 검경이 출동하잖아. 국가 간에도 상대국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괴롭히면 마땅히 응징을 해야한다고 봐. 명백한 악의 세력을 두고 그냥 눈감고 있는다면 그건 오히려 선을 기만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난 전쟁이 인간성을 보호하는 행위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안씨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수식어가 ‘우리나라 1세대 번역가’다. 그는 “언론이 붙여놓은 이름인데, 아마 직장도 다 그만두고 번역을 생업으로 삼은 첫 전문 번역가라는 의미일 거야”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학생 시절 시작한 번역을 기자생활하면서도 소일거리 삼아 틈틈이 해오다, 서른일곱 살에 아예 번역을 업으로 삼았다.

이후 10여 년 동안은 한 달에 단행본 한 권씩 번역해냈다. 엄청난 강도로 일을 하면서도 마감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비결은 철저한 시간관리다. 매일 오전 4~5시면 일어나 일을 시작해 오전 11시까진 오로지 일에만 몰두한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한 뒤엔 잠깐 낮잠을 자며 휴식을 취하고는 다시 일을 시작해 오후 6시까진 전화도 잘 받지 않고 일에 매달렸다.

 일에 몰두하는 만큼 재충전을 위한 휴식도 열심히 취한다. 그의 재충전 방식은 주말마다 숙제처럼 낚시를 다녀오는 것이다. “작가는 아무 것도 안 할 때 가장 많은 일을 하는 거야. 낚시터에 앉아서 가만히 있다 보면 머릿속에서 앞으로 글 쓸 것, 번역할 것, 좋은 대사들이 마구 떠오른다고. 잘 쉬고 나서 책상에 앉아 펜을 잡으면 쓰기만 하면 되는 거지.”

안씨는 휴대전화·신용카드·e메일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휴대전화는 낚시 갈 때만 챙겨. 행여 교통사고라도 나면 보험회사에 연락해야 하니까. 신용카드는 쓸 필요가 없어서 안 만들었고, 인터넷은 일흔 살 때 시작했어. 그래도 아직 e메일은 안 써. 이유는 나랑 관계없는 사람이 연락해오는 것이 달갑지 않아서지.”

  

완성부터 출판까지 27년 걸린 『은마는 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모두가 생각하는 요령과 계산을 다 비켜갔다”고 요약했다. “다들 공부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원없이 놀고, 모두가 자유와 낭만을 만끽하는 대학 시절에 영어 소설 쓴다며 책에 파묻혀 지내고, 기자로 취업해 편하게 지낼 만한 때는 전쟁터로 자원해 나갔다”는 얘기다.

 번역가로 한창 명성을 떨치던 87년, 무작정 미국에 건너가 영어 소설가로 늦깎이 데뷔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요령과 계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흔일곱 살에 ‘이번이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으로 생전 처음으로 미국이란 델 갔어. 미국 살던 대학 동기들이 ‘너 아직도 그 짓(영어 소설 쓰기)하냐’ 그러대.” 텍사스에 사는 동생 집에 칩거하며 『하얀 전쟁』을 영문 소설로 바꾸는 데 꼬박 3년을 쏟아부었다. “결국 영어 책이 출간되고 뉴욕타임스에도 서평이 크게 실리니까 그 친구가 ‘너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웃더라고.”

89년 『하얀 전쟁』 영문판이 출간되고, 90년엔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영문판을 내놨다. “대학교 3학년 때 『은마는 오지 않는다』를 영문 소설로 첫 완성을 했던 거니까, 출판되기까지 27년이 걸린 거야. ‘실패하면 어쩌나’하는 계산이 없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지.”

영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들은 외국에 더 쉽게 알려졌다. 『은마는 오지 않는다』는 덴마크어로, 『하얀 전쟁』은 독일어와 일본어로도 소개됐다. 여기엔 가족의 특이한 이력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내는 충남대 독문과 박광자 교수로 헤르만 헤세 등 독일 문학을 주로 번역해왔고, 쌍둥이 두 딸도 번역가다. 배재대 언어학 교수인 안미란씨는 노르웨이어나 덴마크어 등 13개 국어를, 수녀인 안소근씨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포함해 7개 국어를 구사한다. 안씨는 “네 가족이 쓰는 언어가 25개 국어예요. 내 작품이 독일이나 덴마크에까지 소개된 데는 이런 가족의 도움도 컸죠.”

남들 보기에 ‘허튼짓’을 많이 한 것도 자신만의 삶의 자산이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은 어디 가다 길을 잘못 들어서 여기저기 헤매면 시간 낭비했다고 생각하잖아. 사실은 그건 낭비가 아니고 그만큼 경험이 늘어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난 만화가가 되고 싶어서 고등학교 시절 내내 그림만 그렸고, 영어 소설가가 되겠다면서 대학 시절 내내 영어 소설만 썼다고. 그 당시엔 둘 다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게 어디 허튼 일인가. 결국은 그 모든 게 내 삶에 도움이 됐잖아.” 

안씨는 일흔넷의 나이에 여전히 왕성하게 글을 쓰며 현역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 비결은 “전작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은 덕분”이라고 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작품은 대학교 3학년 때 완성한 뒤 무려 27년을 다듬고 다듬어서 내놓은 『은마는 오지 않는다』야. 대중에게 날 알린 작품은 『하얀 전쟁』이지. 이 두 작품 썼으면 충분히 행복한 거지, 이보다 더 훌륭한 걸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없어. 양희은은 ‘아침이슬’ 한 곡 남겼으면 족하고, 프랑수아즈 사강은 『슬픔이여, 안녕』한 권 썼으면 된 것처럼.”

 요즘 한창 마무리 중인 그의 자서전 마지막 대목도 이런 마음을 담았다. ‘난 오늘도 새벽 4시에 눈을 떠 글쓰기를 시작한다. 지금까지 쓴 작품을 뛰어넘는 최고의 걸작을 써야 한다는 부담도 없고, 졸작을 쓰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없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글쓰는 게 즐겁다.’

글=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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