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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종 서<사회 논설위원>|중공의 딜레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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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공이 미국대통령을 세 사람씩이나 북경에 데려다 연일 축제를 벌였지만 속마음은 그리 평치 못한 것 같다.
문혁이라는 중병을 앓던 어려운 시기에도 월맹에 막대한 군원을 주어 이기게 했으나 통일후의 베트남은 친소화하여 소련에 군사기지까지 내주었다.
이 배신자의 버릇을 고쳐놓겠다고 중공은 79년 군사원정을 단행했다가 고전 끝에 철수해야했다. 최근엔 월·소 합동 상륙 훈련까지 벌였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6·25패망직전에 원군을 보내 겨우 살려주었지만 김일성은 중·소 대립의 틈바구니에서 양다리 외교를 벌여오다가 최근엔 한국-중공 교류에 불만을 품고 소련을 찾아가겠다고 대들고있다.
중공은 북한 소련 몽고 아프가니스탄 인도 네팔 부탄 버마 라오스 베트남 등 10개국과 육속돼있다. 그러나 북한과 네팔 부탄 버마만이 중립을 지킬 뿐 나머지는 모두가 소련의 강력한 맹방이 되어 군사관계를 맺고있다.
이제 북한마저 돌아선다면 소련의 중공포위망은 일단 완성되어 중공의 안보는 중대한 위협을 받게된다.
일찌기 천하를 통일하여 찬란한 문화를 건설해놓고 주변의 제민족을 복속시켜 ?권을 누리면 중화제국의 모습은 오늘의 중공에선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스칼라피노」는 앞으로 상당한 기간 중공은 「거대한 약국」 의 지위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중공의 힘은 많은 인구와 넓은 영토, 거대한 잠재력뿐인데 영토와 인구는 심리적인 안도감은 주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부담스러운 약점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취약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공은 일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것이 근대화노선의 실용주의다. 오늘날의 딜레머는 바로 그 궤도수정에 뿌리를 두고있다.
근대화 방식을 그 주도세력을 기준으로 영·미의 브르좌형, 독·일의 분족형, 중·소의 농민형으로 구분한 학자가 있다.
영·미형은 자본주의로, 중·소형은 공산주의로, 일·독형은 파시즘으로 발전해 나갔으나 파시즘만은 자본·공산 연합세력에 의해 파멸됐다고 「배링턴·무어」는 설명하고 있다.
전후·서구식민주의·제국주의에서 벗어난 신생국들에서 중·소형은 교과서적인 발전모델이 됐었다.
새로 독립을 얻어 자유와 번영을 동시에 시급히 달성하려던 성급한 신생국 지식인들은 당시 근대화를 착착 추진해 나가면 공산주의 방식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실망과 좌절에 직면해야했다. 중공자신을 포함하여 중·소방식을 선택했던 많은 국가들이 영·미 방식을 택한 다른 신생국들과의 경쟁에 패배했기 때문이다.
앞서가던 북한이 한국에 뒤졌고 중공은 강만을 따라갈수 없었다. 홍콩과 싱가포르를 포함한 이들 소위 「신흥공업국가들」(NICS) 과 패전 후 영·미식으로 돌아선 일본 등 자본주의국가들은 놀랄만한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이른바 유교권 자본주의의 경제기적이 창조된 것이다.
이들 5개국은 모두 북한·중공·월남과 똑같은 중국문화권의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왕년의 중화제국을 받들던 변방들인 것이다.
문화적인 배경을 같이하는 같은 지역국가들간의 발전경쟁에서 공산주의 방식이 패배하자 대국을 자처하던 중공이지만 근대화 노선을 바꾸고 말았다.
서방의 기술·자본과 경영방식·가치관까지도 받아들이려는 중공의 방침은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됐다. 그 점에서 중공은 이미 「시저」처럼 루비콘강을 건너선 것이다.
그것은 덩치가 큰 나라로선 모험이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중공은 체면은 잃었지만 그런 결단이 바로 중공의 강점이기도하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이나 베트남이 동행을 거부한데 있다. 그것은 62년 쿠바 미사일위기직후 「호루시초프」가 평화공존과 수정주의로 전환했을 때 모택동이 동행을 거부한 것과 똑같다.
소련은 중공을 팽개치고 갈 길을 가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중공은 북한만은 팽개치고 갈 수 없다는데 고민이 따른다.
중공이 이 딜레머를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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