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후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생활시조의 거의가 두수일편과 단수들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지면이 충분치 못한 이유도 있읍니다만, 그보다는 단수가 시조를 형성하는 기본골격이요, 또한 근본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수일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시조가 가장 짧은 호흡과 리듬속에 현대라는 제양상을 수용하려면 적어도 두수일편의 길이는 되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단수의 경우, 시조로서 성공을 거둔 작품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 그것이 대개의 경우, 운치와 묘를 얻는 선에서 끝나므로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아쉬운 선에서 손을 뗄수 있는 멋도 좋지만 역시 미흡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두수냐, 세수냐를 두고 오랜 창작을 계속하게 되는데 적어도 10년 이상 시조와 씨름한 중견시인들의 말은 현대시조로서 성공을 거두려면 아무래도 가장짧은 형태라해도 시조의 길이가 두수일편은 되어야 하겠더라고 실토합니다.
이 말은 이미지의 압축과 탄력을 시조가 유지하면서 현대시로서의 면모도 함께 갖추려면 그러합니다. 물론 실력이 뒤따른다면 연작은 길어도 좋겠고 나아가 사설시조에 손을 뻗쳐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이영주의 『어시장에서』는 진한 생활감각이 물씬 풍기고 표현이 날카롭습니다. 그런 사고는 종장에 <업보>까지 끌어내고 있습니다. <말없는 옛사연들이 갑고리에 뒤척이고>등이 그러합니다.
김옥남의『시골장날』은 평이한 언어로 구성했지만 장날의 분위기가 군침을 돌게 합니다. 이만한 안목, 이만한 해학이 깃들기란 쉽지 않음을 아시기를-.
이기동의『소복』은 소복이 안고 있는 분위기가 어딘지 으시시하게 느껴집니다. 이미지가 소복의 핵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만 몇군데 언어의 애매성은 극복해야 할것입니다.
강호연의『조약돌이 되어』는 순순한 이미지인데 여기서<살고 싶다 말할게다>가 초장과 종장에 있어 큰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봅니다.
손구자의 『배달소년』은 신문을 활활 타는 불꽃으로 본 초장과 특히 종장의 표현은 눈에 띕니다. 역시 단수의 성패는 종장에 있음을 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