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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바깥에서 보는 한국

한국은 '국제행사 강박증'에서 벗어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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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에이단 포스터-카터
영국 리드대 명예 선임연구원

2012년 여수 세계박람회가 남긴 것은 슬픈 황량함이다. 여수를 바라보면 한국이 왜 자꾸 대규모 국제행사를 개최하려는지 의문이 생긴다. 오래전부터 그 이유가 궁금했다.

 1980년대만 해도 국제행사는 세계 무대에서 무명(無名)인 한국을 알리는 훌륭한 국가 전략이었다. 88년 과감한 여름올림픽 개최 신청은 그 전주곡이었다. 서울 올림픽이 대성공을 거두리라는 것은 물론 한국이 개최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당시 대한민국과 수교한 공산국가가 없었다는 건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80년과 84년 올림픽과 달리 국제정치는 서울 올림픽을 망치지 못했다. 평양의 보이콧 주장을 무시하고 중국·소련·동구권 국가들이 선수단을 파견했다.

 둘째 우려는 올림픽 개최가 독재를 정당화할 가능성이었다. 역사의 변증법은 정반대로 작용했다. 서울 올림픽은 한국 민주주의의 복원을 축하하는 잔치가 됐다(불행히도 같은 일이 2008년 베이징에서는 재연되지 않았다).

 서울 올림픽은 두 가지 면에서 성공했다. 코리아라는 국가 브랜드가 세계 지도에 확고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또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북방외교에 순풍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기회는 희귀하다. 필요성도 덜하다. 물론 그런 기회가 있으면 항상 붙잡아야겠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도 성공을 이어 갔다. 그의 덕에 한국은 2008년 금융위기를 잘 헤쳐 나갔을 뿐만 아니라 금융위기를 한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로 삼았다. 한국은 주요 20개국(G20) 모임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2010년에는 제5차 G20 정상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한국은 2012년 두 번째 핵안보정상회의(NSS)를 개최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비록 북한 김정일이 그 회의에 나타나 핵 포기를 선언할 것이라는 이상한 오판을 했지만, 어쨌든 NSS는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이 모이는 수뇌 회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세 차례의 아시안게임, 두 차례의 유니버시아드,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2018 평창 겨울올림픽 등 국제 스포츠 행사는 한국이라는 국가 브랜드를 공고히 하는 기회다. 또한 다른 채널이 막혔을 때 북한과 접촉할 기회를 마련한다.

 한국은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국제회의를 한 번 이상 개최했다. 이제 국제회의는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들에서도 일상적인 일이 됐다. 한국을 세계 문화 지도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만드는 효과도 있다. 수많은 외국인이 불고기를 처음 맛보는 기쁨을 국제회의 참가를 계기로 체험한다. 숙박·요식업에도 도움이 된다. 나는 취재차 93년 대전 엑스포에 왔다. 이코노미스트에 게재한 기사에도 썼지만 한국의 발전상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한국인들을 접하는 게 내가 느낀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렇다면 국제행사 개최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일까. 문제는 지나친 낙관주의와 부실한 계획 때문에 발생하는 예상하지 못한 비용이다. 더욱이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은 서울의 숨 막히는 그늘로부터 벗어나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물론 공감은 가지만 지자체들이 “납세자들의 돈을 창의적인 방식으로 낭비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게 문제다.

 충북 괴산군은 거대 가마솥을 만드는 데 5억원을 날렸다. 2013년 세계조정선수권대회를 개최한 충주는 990억원을 투자했으나 수입은137억원에 불과했다.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어떻게 예산을 분담하는지 모르겠으나 이제 중앙정부는 꼭 그런 행사를 열어야 할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충주의 교훈은 브레이크를 밟을 필요성을 제기한다. 지금은 2015년이다. 88년이 아니다. 삼성과 현대차, 싸이와 한류 덕분에, 그리고 올림픽을 비롯한 과거의 국제행사 덕분에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입소문이 났다. 세계는 한국에 대해 이미 듣는 바가 있다. 임무 완료다. 세계 곳곳에서 한국의 명성이 자자하다.

 이제 한국도 어떤 행사를 선별해야 할지 여유가 생겼다. 달리 표현한다면 비용이나 자금 회수, 행사가 가져올 국위 선양의 정도를 따지지 않고 마구잡이로 국제행사를 유치할 필요가 사라졌다. 국제행사 개최에 더 큰 안목을 가져야 할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국의 국제행사 개최는 습관을 넘어 중독이 됐는지도 모른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처럼 돼 버린 것일까. 의심할 여지없이 한국은 국제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데 정말 소질이 있다. 10여 년 전 ‘허브(hub)’라는 단어가 유행어가 됐듯이 바로 그런 욕구가 국제행사 개최를 계속 부채질할지 모른다. 그 욕구를 몇 마디로 표현하면 이런 것들이 아닐까. 한국을 바라봐 주세요! 우리를 보러 오세요! 한국을 잊지 마세요! 국제행사는 아직 한국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효험이 있다. 아마도 이 점이 국제행사가 아직도 한국에서 그 성공의 역사를 멈추지 않는 이유다.

에이단 포스터-카터 영국 리드대 명예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