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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60〉여수 영취산 등산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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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달뜨는 봄날에는 꽃길을 걸어야 한다. 꽃길을 걸으려면 먼길 달려가는 수고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 탁한 공기만큼이나 하수상한 시절이어서 꽃잎 흩날리는 동네 산책길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온전한 꽃길을 걷고 싶어서 week&은 전남 여수로 내려갔다. 거기에서 진달래 색동옷을 빼입은 영취산에 올랐다. 영취산 자락에는 우리 강산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진달래 군락지가 펼쳐져 있다. 영취산 등산길은, 이름에 등산이 들어있지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장 긴 종주 코스가 4.3㎞에 불과했다. 입로와 우회로도 다양해 수준에 맞게 골라 걸을 수도 있었다. week&은 지난달 30일과 지난 4일, 두 번 영취산에 올랐다. 조금이라도 더 붉게 물든 산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여수 영취산이 눈부신 분홍빛 옷을 빼입었다. 가마봉에서 원상암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진달래가 가장 빽빽한 구간이다. 하늘에서 분홍 물감을 끼얹은 것 같다.

꽃 잔치 절정인 여수의 봄

여수가 여행 전성기를 맞았다. 지난 2일 KTX 호남선이 개통하면서 여수가 가까워졌다. 서울에서 여수까지 2시간 40분 거리이니, 당일 여행도 가능해졌다. 새로운 볼거리도 생겼다. 지난해 12월 자산공원과 돌산공원을 잇는 해상 케이블카가 들어섰다. 여수 여행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면서 케이블카 정류장 앞은 늦은 밤까지 북새통이다.

지난달 29일 여수는 봄이 절정이었다. 벚꽃과 매화가 만발했고, 길가에는 개나리와 목련도 활짝 피었다. 여수의 가로수인 동백꽃은 길바닥에 나뒹굴며 거리를 붉게 물들였다. 지상의 온갖 꽃이 ‘내가 봄의 주인공’이라며 떠들어대는 것 같았다.

바다도 봄을 맞아 분주했다. 어시장은 경매가 한창이었다. 싱싱한 아귀·가자미·서대가 나무 상자에 담겨 분주하게 팔려나갔다. 낮에는 수산시장 주변에 관광 버스가 줄지어 섰고, 관광객은 갓김치와 해산물을 양손에 싸들고 다녔다. 시장 주변 식당은 갯것을 먹으러 온 외지인으로 바글거렸다.

최근에는 두 발로 걸으며 여수의 비경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많아졌다. 몇 년 사이 걷기 좋은 길이 많이 생긴 덕이다. 2010년 금오도 벼랑을 따라 걷는 ‘비렁길’이 조성됐고, 2013년에는 바다와 갯벌이 어우러진 ‘갯가길’이 개장했다.

대부분 바다를 끼고 걷는 근사한 길이지만, week&은 여수에서 가장 높다는 영취산으로 향했다. 그냥 봄이 아니라 4월에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이 기다리고 있어서였다. 3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영취산은 진달래꽃으로 오른다. 수만 송이 진달래꽃이 온 산을 뒤덮는다.

여수시는 매해 4월 초 ‘영취산 진달래 축제’를 연다. 개화 시기를 예상해 3일간 축제를 여는데, 축제 기간에만 10만 명 이상이 산을 찾는다. 올해는 지난 3~5일 축제를 열었다. 궂은 날씨가 이어져 진달래꽃 만개 시기는 예상보다 늦어졌지만, 정취를 만끽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여수시는 다음 주까지 영취산에서 진달래꽃을 만끽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진달래와 편백나무가 어우러진 골명치 쪽 임도는 영취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힌다.

분홍 물감 끼얹은 영취산

영취산이라고 하면 보통 이웃한 진례산까지 아우른다. 이 경우, 진례산은 진례봉(510m)으로 강등된다. 영취산 주봉 영취봉(436m)은 진례봉보다 낮다. 2003년 옛 지명찾기 사업으로 영취산과 진례산을 따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영취산이 더 익숙하다. 여수시도 영취산과 진례산을 구분하지 않을 때가 많다. 행사는 진례산 쪽에서 하면서 ‘영취산 진달래 축제’라고 한다.

영취산은 전국 진달래 3대 군락지 중에서도 첫손에 꼽힌다. 경남 창녕의 화왕산, 인천 강화도의 고려산 등 진달래 군락지는 많지만, 영취산의 명성은 따라가지 못한다. 진달래 수만 그루가 산을 덮은 면적만 약 1㎢에 달한다. 등산로도 다양하다. 여러 등산로 중에서 돌고개에서 출발해 진례봉을 거쳐 봉우재로 내려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거꾸로 걸으면 경사가 급하고 오르막이 길다.

지난달 30일 돌고개 쪽 등산로로 진입했다. 30분쯤 걸어 골명치로 빠지는 갈림길에 닿으니 진달래 군락지가 나타났다. 멀리 영취산 능선이 내다보였다. 동쪽 능선은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었는데, 서쪽의 산 정상부는 아직 거무튀튀했다.

출발 40분 만에 가마봉(457m) 전망대에 닿았다. 가마봉에서 개구리바위를 지나 진례봉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진달래 산행의 하이라이트로 불린다. 꽃이 만개하지는 않았지만, 능선의 우아한 자태만으로도 매력적이었다. 등산객 임병선(57)씨는 “영취산은 진달래가 없으면 심심하지만 걷는 내내 시야가 트여 있고 능선이 아기자기해 걷는 맛이 있다”고 말했다.

진례봉으로 가지 않고 꽃이 가장 많이 핀 원상암 쪽으로 내려왔다. 큰 나무가 없어 민둥산을 걷는 것 같았다. 키 작은 진달래 사이를 걸을 때는 분홍 구름 위를 걷는 듯했고, 어른 키보다 조금 큰 진달래 터널을 지날 때는 기차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진달래 군락지가 끝나는 지점에는 오리나무 6그루가 정겹게 서 있었다. 조금 더 걸으니 편백나무 숲이 나타났다. 그늘이 많지 않던 산행에서 가장 시원한 순간이었다. 숲이 끝난 지점부터 임도 1.8㎞를 걸어 출발점 돌고개로 돌아왔다.

영취산 정상부는 큰 나무가 없어 시야가 탁 트인다. 북쪽으로 여수 국가산업단지와 묘도가 내려다보인다.

억세고 질긴 진달래의 운명 

지난 4일 닷새 만에 다시 영취산을 찾았다. 찬란한 분홍 물결을 충분히 못 본 게 아쉬웠다. 이번에는 상암초교에서 출발했다. 축제 기간이라 봉우재 주변에는 이른 아침부터 인산인해였다. 등산로에 빈 틈이 보이지 않았다. 닷새 전과는 사뭇 달랐다. 길도 가팔랐고, 도솔암을 지나 진례봉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울퉁불퉁한 바위 길이었다. 가파른 벼랑, 바위 틈틈이 피어난 진달래꽃이 기암괴석과 어우러지며 절경을 빚었다. 봉우재~진례봉 코스가 돌고개~진례봉 코스보다 훨씬 남성적이었다.

여수시청에 따르면 이날 진달래 개화는 90%까지 진행됐다. 꽃만 많이 핀 게 아니었다. 분홍 빛깔도 더 진해졌다. 하늘에서 진한 분홍 물감을 끼얹은 것 같았다. 수줍은 소녀의 발그레한 낯빛을, 처녀가 빼입은 단아한 분홍 저고리를 떠올렸다면 너무 낡은 감상인 걸까? 어쨌든 진분홍 진달래는 사람의 가슴을 뛰게 했다.

1시간 만에 정상에 닿았다. 진례봉은 뾰족한 암봉이었지만 데크로드와 철계단이 있어 걷기에 어렵지 않았다. 정상에 서니 일망무제의 비경이 펼쳐졌다. 바다와 섬, 육지가 뒤섞인 여수의 독특한 지형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1960년대에 조성한 국가산업단지였다. 공장에는 육중한 탱크와 거미줄 같은 파이프가 빼곡했고, 굴뚝에서는 희뿌연 연기가 연신 뿜어져 나왔다. 분홍빛 산과 잿빛 공장이 어우러진 모습이 낯설었다.

영취산에 진달래 군락지가 생긴 게 산업단지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공장 매연으로 산이 산성화되면서 나무 대부분이 죽고, 억척스러운 진달래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다. 김미정 문화관광해설사는 “영취산은 원래 나무가 자라기 힘든 돌산”이라며 “먼 옛날 큰불이 난 뒤 진달래가 산을 덮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고 설명했다.

무엇이 저 가멸찬 분홍 물결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라는 김훈의 문장만 계속 뇌리에 맴돌았다.

●여행정보=영취산 등산로는 다양하다. 돌고개~진례봉 2.2㎞, 상암초교~봉우재~진례봉 2.3㎞코스가 기본이고, 원상암·골명치 등으로 빠지는우회로도 있다. 진달래 감상이 목적이라면 상암초교나 흥국사로 진입해 봉우재까지만 다녀와도 된다. 종주 코스는 돌고개~진례봉~봉우재~흥국사로 이어지는 4.3㎞ 길이다. 약 3시간 소요.

KTX를 타고 여천역에서 내리면 영취산이 가깝다. 서울시청에서 영취산 입구까지는 자동차로 약4시간30분 걸린다.

산행 뒤에는 여수의 진미를 맛봐야 한다. 봄철엔 도다리쑥국·서대회도 좋고, 밥상에 향긋한 돌산갓김치만 있어도 밥 한 그릇 뚝딱 비울 수 있다. 이번엔 장어탕을 먹었다. 교동 ‘진미장어탕’은 붕장어를 통으로 넣고 숙주·미나리와 함께 끓여낸다. 1만2000원. 061-664-9723.

새조개는 먹을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여서동 ‘세자리’는 새조개 샤브샤브 한가지 메뉴만 다룬다. 새조개와 채소를 육수에 담가 먹은 뒤 매생이라면으로 입가심을 한다. 12~5월에만 식당을 연다. 새조개 샤브샤브 한 접시 8만원. 061-652-4828. 여수시청 관광과 061-690-38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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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추천 길’ 4월의 주제는 ‘봄맞이 길’이다. 흩날리는 꽃잎을 맞으며 걷는 길 10개를 선정했다. <표 참조> 이달의 추천 길 상세 내용은 ‘대한민국 걷기여행길 종합안내 포털(koreatrails.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걷기여행길 포털은 전국 540개 트레일 1360여 개코스의 정보를 구축한 국내 최대의 트레일 포털사이트로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한다.

글=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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