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정부 실패'가 더 무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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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근 화물연대의 집단행동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처방식을 보고 독일의 한 신문은 사설에서 "한국은 큰 목소리만 내면 다 얻는 나라"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파업하기 좋은 나라'로 비아냥 받고, '한국은 지금 파업전야'라는 머리기사가 국내 한 경제신문에 문패처럼 내걸리기까지 했다.

사스 여파로 한국은 중국이나 대만 등 경쟁상대에 비해 이미지 상승 효과를 올릴 수 있었는데 발빠르게 대응치 못해 기회를 놓쳤다는 지적들도 따랐다. 일부 글로벌 기업들은 지금까지 한국 항만은 중국 등에 비해 인건비가 비싸도 수송과 하역은 정확하고 안심할 수 있어 좋았는데 이 장점마저 사라졌다고 안타까워한다.

미국 가서 '급한 불'을 끄고 온 노무현 대통령의 '욱'하는 심정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대통령직을 못 해먹겠다"는 말은 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대통령은 최종적인 이해조정자가 아닌가. 가십(gossip)이나 푸념 정도로 흘려버릴 법한 이 말을 파이낸셜 타임스가 정색을 하고 다룬 것도 이례적이다. 대통령 스스로 국가기능 마비를 우려하고, '자기비하'를 서슴지 않는 상황은 곧 그 나라의 대외신인도에 적신호가 아니고 무엇이랴.

필자는 지난달 본란에서 '5월 위기 차단이 급하다'고 주장하면서 위기의 화근(禍根)으로 대통령의 미국 방문, SK글로벌의 실사결과 발표, 무디스 등의 국가신용등급 재조정 세 가지를 들었었다. 국익을 우선한 '실용외교'로 한.미 간 '외교적 재앙'은 면했지만 핵심적인 견해차는 유보된 상태다.

북핵에 대한 제재의 길은 열려 있고, 미군의 한강이남 재배치도 계획 자체가 달라진 것은 없다. 엊그제 미국 텍사스목장에서 미.일 정상은 북핵에 대한 '추가적 조치'를 넘어 '강경조치'에 합의해 우리를 압박하는 상황이다. SK글로벌의 엄청난 회계분식은 한국 기업 회계 전반에 불신을 드리우고 있고, 특히 그 부실처리 여부는 국제적 주목을 받고 있다.

한.미 공조체제의 복원으로 국가신용등급의 하향조정 위기는 모면했지만 다음달 다시 조정이 예정돼 있다. 이들 세 불안요인은 어느 것 하나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진행형'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국정운영 능력 미숙이 도마에 올랐다. 잇따른 파업경고와 일련의 불법 집단행동들은 대부분 노사 간이 아닌, 노정(勞政) 이슈라는 점이 주목을 끈다. 무작정 밀어붙이고 보자는 쪽도 문제지만 대통령이 말이 너무 많고, 앞서가고, 처음서부터 한쪽만 편들다 뒤늦게 입장을 바꾸는 등 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더 강하다.

우리 사회의 갈등구조는 노사갈등과 빈부격차 확대에다 이념.세대 간 갈등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들고 있다. 盧대통령의 희망대로 매뉴얼만 갖고 시스템으로 굴러갈 수 있게 하려면 사회통합의 메커니즘과 통합의 리더십이 확립돼야 한다. '코드가 맞는' 부류들에 의한 '반쪽 대통령'으로는 진정한 참여정부도, 사회통합도 공염불이다.

특히 포퓰리즘은 사회통합에 독(毒)이다. 통합의 리더십은 자신의 지지세력을 배반하는 용기도 요구한다. 갈등을 부추기고 키워온 김대중 정부의 5년이 그 산 교훈이다. 국정운영에 토론이 능사가 아니다. 토론에 부칠 사안과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사안은 구분함이 옳다.

다음주에 盧대통령은 취임 1백일을 맞는다. 시행착오는 이쯤에서 접고 '노무현충격'보다 '노무현효과'를 창출해낼 수 있는 국정운영체제를 다시 짜야 한다. 선거 때 동지들을 비서실로, 내각으로 옮겨다 놓은 대통령치고 성공한 예가 없다. '시장의 실패'보다 '정부의 실패'가 더 무섭다는 것을 대통령은 유념해야 한다.

변상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