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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이 묻다, 죽음 그리고 중년의 욕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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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임 감독은 “100편이 넘게 영화를 찍었지만 이번처럼 관객 반응이 궁금한 영화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사진 전소윤(STUDIO 706), 리틀빅픽처스]

암에 걸려 죽어가는 아내와 다른 젊은 여자 사이에 선 50대의 사내. 거장 임권택(79) 감독의 102번째 시선은 그를 향했다. ‘화장’(9일 개봉)은 얼굴을 곱게 꾸미는 것(化粧), 그리고 시신을 불살라 장사 지내는 것(火葬)이라는 뜻을 모두 담은 제목처럼, 삶과 죽음의 두 얼굴을 들여다본다.

영화는 주인공 오정석(안성기)의 감정을 따라 흐른다. 오정석은 국내 굴지의 화장품 회사 내 직책인 오 상무 혹은 뇌종양을 오래도록 앓는 아내(김호정)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남편의 자리가 더 익숙한 중년이다. 전립선 비대증을 앓는 그는 생리 현상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가 젊고 매력적인 회사 여직원 추은주(김규리)에게 끌린다. 영화는 삶의 무게가 내려앉은 남자의 주름진 얼굴, 그리고 그의 욕망을 찬찬히 바라본다. 곁에 있는 아내가 죽음이라면, 추은주는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생의 감각이다.

 임권택 감독은 “오 상무 역은 처음부터 안성기여야만 했다”고 말했다. ‘만다라’(1981) ‘태백산맥’(1994) 등 총 여덟 편의 영화에서 감독과 배우로 만난 덕에 “눈빛만 봐도 아는 사이”라서만은 아니다. 안성기가 평소 보여준 인품 때문이다. “노련하고 성실한 느낌을 주면서도, 젊은 여자에 끌리는 50대 사내를 순수하게 표현할 배우는 그밖에 없다”는 것이 임 감독의 설명이다.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연출작 ‘화장’의 한 장면. [사진 전소윤(STUDIO 706), 리틀빅픽처스]

 원작은 2004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소설가 김훈의 단편소설로, 제작사 명필름에서 먼저 영화화를 제안했다. 임 감독은 “김훈의 힘 있고 박진감 넘치는 문장을 영상으로 제대로 옮기지 못하면 열패감이 클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존 작품과는 다른 형식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임권택’하면 떠오르는 영화 ‘서편제’(1993) ‘취화선’(2002) 등과 다르다는 뜻이다. “오 상무는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추은주에게 빨려들며 일종의 정신적 쏠림현상을 겪는다. 한 사내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감정을 솔직하게 따라가는 영화로 찍었다.”

 자칫 관념적 표현에만 주목하면 공허한 영화가 되기 십상이다. 때문에 임 감독은 사실적 표현에도 공을 들였다. 이미 화제를 모으고 있는 병원 욕실 장면이 대표적 예다. 오 상무가 용변으로 더러워진 아내의 아랫도리를 씻긴다는 설정에 따라 배우의 전신이 등장한다. 처음엔 카메라에 배우들의 상반신만 담을 예정이었지만, 모니터를 본 감독의 성에 차지 않았다. 결국 촬영을 중단하고 배우를 설득한 끝에 탄생한 장면이다. 임 감독은 “김호정의 용기가 아니었다면 영화 전체가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라며 “그 장면은 이 영화의 저울추”라고 말했다. 이 장면으로 이전까지의 이야기는 물론 그 이후의 모든 이야기까지 그 장면 하나로 균형을 맞추게 된다는 뜻에서다.

 임 감독은 막 60대에 접어들던 무렵인 1996년에 ‘축제’를 찍었다. 죽음으로 인한 삶의 화해를 이야기하는 영화다. 임 감독은 “그때의 나는 죽음을 치장하기 바빴다”고 말한다. “60대는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할 때이지만, 동시에 거창하게 치장하는 버릇도 생길 때다. 이 나이에는 치장할 수가 없다.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특별히 아쉬울 것도 없다.” 이는 감독이 ‘화장’에서 죽음을 슬프고 아쉬운 것으로 그리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은선 기자 haroo@joongang.co.kr
[영상 유튜브 MYUNGFILMS 채널]

★ 5개 만점, ☆는 ★의 반 개

★★★★(김형석 영화평론가): 오물투성이의 죽음, 염치 없는 욕망. 살아가고 죽어가는 것의 구차한 이치.

★★★(지용진 기자): 임권택 감독이 탐구한 중년 남성의 내면에는 삭풍이 불었다. 자연의 풍경을 관찰해 온 거장이 그린 중년 남성의 서글픈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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