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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풀기' 나선 유럽발 직격탄…한국 기업들에 쓰나미 공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독일 폴크스바겐은 최근 미국 시장에서 ‘인센티브(할인액ㆍ금리인하 등 판매장려금)’를 강화하며 차값을 평균 2000달러 깎아줬다. 유로화 약세로 수출가격을 인하할 여력이 생기자 차값 할인에 나선 것이다. 그러자 ‘제값 받기’를 고수하던 현대자동차도 울며겨자먹기로 2000달러 넘는 인센티브를 투하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어려운 한국경제가 유로화 약세에 시름이 더 깊어가고 있다. 독일 등 유럽의 주요 기업들이 유로화 약세를 등에 업고 가격을 내리면서 한국의 수출기업을 괴롭히고 있다. 유럽산 제품의 수입이 늘면서 무역수지 적자 규모도 커지고 있다.

최근 주요 증권사의 리서치센터장들이 ‘자동차ㆍ기계ㆍ화장품ㆍ패션업’ 을 주제로 전략회의를 했다. 한 센터장은 "독일ㆍ프랑스ㆍ이탈리아 회사들과 경쟁하는 업종에 비상이 걸렸다는 우려가 쏟아졌다"며 "특히 “유로화 하락이 2~3년간 이어지면서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잿빛 전망도 나왔다"고 전했다.

수출 기업의 경우 유로화 약세에 따른 원화가치 상승으로 같은 물량을 팔아도 손에 쥐는 돈이 적어지면서 채산성 또한 크게 나빠지고 있다.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A기업은 독일ㆍ이탈리아에 해마다 300만 달러 넘게 수출한다. 대금의 80%는 유로화로 받는다. 그런데 유로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앉아서 손해를 본다. 유럽 바이어들에게 수출 단가를 올려 줄 것을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유럽 경기가 안 좋은데 수입 비용까지 올라가면 곤란하다”며 거부당했다고 말했다.

유로화 가치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다. 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원화에 대한 유로화 가치는 지난해 3분기 1유로 당 1362원에서 올 1분기엔 1239원으로 9% 싸졌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지난 달부턴 매달 75조원씩 시장에 돈을 푸는 매머드급 ‘양적 완화’에 돌입한 탓이다.

국내 내수 시장에도 충격파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샤넬 효과’다. 프랑스 명품회사인 샤넬은 지난달 중순 핸드백 값을 내려 화제가 됐다. 중간 크기의 ‘클래식 백’은 643만원에서 538만원으로 떨어졌다. 스위스의 유명 시계업체인 태그호이어도 국내 판매가를 최대 27% 내리면서 770만대 제품이 560만원 선으로 싸졌다. 회사 측은 “유로화 약세로 각국 제품의 가격차가 벌어져 본사가 값을 조정했다”고 설명했다.

롯데ㆍ신라 등 면세점에선 이례적인 ‘환율 보상’ 세일까지 진행 중이다. 유럽의 패션ㆍ시계 브랜드 등 수십개사가 참여해 최대 15%까지 깎아주는 행사다. 업계에선 ‘샤넬 충격파’를 물꼬로 업체들이 연쇄 할인에 뛰어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패션업체인 F사 관계자는 "유럽 업체들의 가격 흐름을 주시하면서 대응책 마련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가뜩이나 불어난 유럽연합(EU)과의 무역적자는 유로화 약세 때문에 그 골이 더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2012년부터 적자로 뒤바뀐 대 EU 무역수지는 지난해 사상 최고인 107억 달러를 기록했다.

제현정 국제무역연구원 통상연구실 연구위원은 “영국산 브렌트유 수입이 적자에 한 몫을 했지만, 자동차와 고급 소비재 수입이 급증한 것도 큰 이유”라고 말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환율 영향을 많이 받는 중소·중견 기업을 대상으로 한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준술ㆍ이소아ㆍ김영민 기자 jso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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