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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생각한다는 건 인간의 반목을 돌아보는 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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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호 17면

양혜규 작가가 괴목과 밤나무, 느티나무, 바둑판 등으로 만든 2015년작 39정지(井址)39 앞에 앉아있다.

그곳에는 ‘코끼리’가 있다. 살아있는 코끼리나 코끼리를 닮은 무엇이 아니다. 코끼리에 대한 ‘개념’이다.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의 양혜규 개인전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5월 10일까지)를 보러온 관람객들은 ‘코끼리’를 찾고, 이해해야 한다.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그렸던 코끼리 삼킨 보아뱀이 커다란 모자처럼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서.

리움서 개인전 연 설치 미술가 양혜규

이번 전시는 독일 베를린을 근거지로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설치미술가 양혜규(44)가 5년 만에 국내에서 갖는 대규모 개인전이다. 신작과 작가 경력에서 터닝포인트가 될만한 대표작이 함께 소개되고 있다. 코끼리·사자춤·짚풀·주렁주렁 토템·블라인드와 뒤집기라는, 이번 전시에 나타난 5가지 키워드로 그의 작품 세계를 열어본다.

'상자에 가둔 발레'(2013/2015).

코끼리
전시 제목이 독특한데, 코끼리는 무슨 의미인가.
“코끼리가 서식하지 않는 지역에 코끼리 모양에서 따온 상형문자(象)가 존재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제목의 앞부분은 조지 오웰의 『코끼리를 쏘다』, 뒷부분은 로맹 가리의 『하늘의 뿌리』에 등장하는 코끼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붙였다. 오웰은 영국 경찰로 미얀마에서 5년간 근무했다. 난동 피우던 코끼리를 어쩔 수 없이 사살하면서 식민지 지배-피지배 관계의 폭력성과 비인간성을 체험하게 된다. 로맹 가리의 소설에서 상상의 코끼리는 주인공이 암담한 현실을 견뎌내게 하는 힘이지만, 현실에서 코끼리는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약한 존재다. 코끼리를 생각한다는 것은 인류의 반목을 재고하고, 자연을 끌어안는 좀 더 포괄적 사고를 지향한다는 말이다.”

양 작가가 요즘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새로운 진정성“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미술에서 진정성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무언가 회복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이성적으로만 회복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원시적인 것으로 회귀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일종의 훈련된 순수함이 필요한 거다. 상상의 코끼리를 살리자는 취지다.”

그는 작품에 대한 참고 목록이 많은 작가, 매력적인 제목을 잘 붙이는 작가로 유명하다. 전시 부대행사에 양혜규가 읽은 도서들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방대한 독서량을 자랑한다. 알 듯 말 듯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제목은 작가의 풍부한 시적인 상상력과 유머감각을 보여준다. 이 제목들에 대해서 상상해보는 것이 관전 포인트의 하나다.

맨 왼쪽 벽면에 보이는 작품이 39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자춤-신용양호자 #24039(2015).
가운데 인조 짚풀을 이용한 39중간 유형-외발 사자춤39(2015), 오른쪽이 39중간 유형-보로부두르에 부쳐39(2015).

사자춤
‘외발 사자춤’ ‘그 위에서 내려다본 사자춤’ 등 춤과 연관된 제목을 가진 작품들이 많다.
“사자춤은 아시아 전역에 다양한 형태로 퍼져있는데, 실제로 사자가 서식하는 지역은 별로 없다. 로맹 가리가 코끼리를 상상하며 힘과 희망을 얻었듯, 사자가 살지 않는 지역의 사자춤은 주술적인 성격이 있다. 사자춤 같은 것을 흔히 ‘토속적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세계에 공통된 것이다. 낯선 것을 상상하고 춤추어 내는 능력이 모든 민속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양혜규의 전시 자체가 ‘강력한 힘을 가진 사자춤 한 판’이다. 편가르기를 좋아하는 서구적 관점에서 ‘토속적’이라는 말은 서구 문명이 아닌 다른 문명의 지역성을 배타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그러나 양혜규가 보기에 사자춤처럼 낯선 존재를 끌어안고 가는 공존의 기술이 바로 ‘토속적’인 것의 핵심이다. ‘토속적’인 것은 특정 국가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중간 유형’ 시리즈로 이어진다.

짚풀-중간유형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인 짚풀 작업들은 흥미로운 논란을 일으켰다. ‘중간 유형’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지금까지 내가 해온 작품과는 다른 유형의 작품이라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리스크가 없으면 새로울 것도 없다. 최근 손으로 꼬고 엮고 하는 작업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향후 몇 년 동안은 이 짚풀 작업을 이어가 볼 생각이다. 사실 짚풀 공예도 사자춤처럼 다양한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등장한다. ‘중간’이란 말은 평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서로 다름을 전제로 한 공통의 특성, 총체적인 보편성을 말한다. 중간이 있다는 것은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다는 거고 음양도 있다는 거다. 어디에 치우치지 않다는 이야기고, 둘 사이에 끼어있는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다.”

양혜규는 이번 전시에 마야의 엘 카스티요와 인도네시아 고대 불교 사원인 보로부두르, 러시아의 이슬람 사원 라라 툴판을 본떠 짚풀로 만든 작품을 선보였다. 각기 다른 시대, 다른 나라의 종교적 건축물들이지만 같은 재료로 만들어지니 차이점 속에서도 서로의 닮음이 두드러져 보였다. ‘외발 사자춤’ ‘중국 신부’ 같은 짚풀 조각들처럼 골동 방울, 족두리, 선인장, 전복 껍데기 등을 주렁 주렁 달고 있다. 짚풀이라는 재료는 민속적이고 친근하지만, 이런 형상들은 ‘기괴한 상상의 토템’을 연상시킨다.

주렁주렁 토템
광원조각은 행거나 빨래걸이 같은 스탠드에 전구와 다양한 물건들을 걸어놓은 작품이었다. ‘중간 유형’의 짚풀조각에도 여러 물건을 주렁주렁 걸어놓았다.
“그렇게 주렁주렁 다양하게 걸어놓는 것은 내가 마음이 가난해서 그렇다.(웃음) 이런 작품을 할 때는 각설이를 떠올린다. 거지들은 모든 살림을 한꺼번에 다 가지고 다닌다. 일종의 삶의 총동원이다. 광원조각이 묘사하고 있는 존재는 가진 것을 모두 드러내는 내면이 약한 존재들이다. 그렇게 축적하는 데에는 한편으로는 하이브리드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A와 B가 동시에 있으면서, 결코 A와 B로 환원되지 않는 제 3의 것이 되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토템과도 연관이 있다. 돌 하나에도 신성한 영이 있다고 믿는 일이다. 옛날 토템은 각각의 사물에 기원을 하나씩 대응시키고, 그 사물들을 비논리적으로 쌓아나가는 것이었다.”

에콜 드 보자르 학장 니콜라 부리오는 양혜규의 작품을 “모더니즘 조각이라기보다는 원시적 조상(彫像)을 떠오르게 만드는 동시대의 토템처럼 보인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우리 삶은 단순하지 않다. 밥은 맛있어야 하고, 공부는 잘 해야 하고, 기차는 잘 달려야 하고, 나라는 평안해야 한다. 민화나 전통 사설에 등장하는 기나긴 나열은 일종의 온갖 복이 다 들어오기를 바라는 ‘길상의 복합화 양상’이다. 이런 주렁주렁 많은 바램들을 현대 작가 양혜규는 위트 있게 표현하고 있다.

블라인드, 그리고 뒤집기
양혜규 하면 블라인드 작품을 떠올린다. 이번에도 ‘솔 르윗 뒤집기 -23배로 확장된, 세 개의 탑이 있는 구조물’과 ‘성채’라는 대형 작품이 선보였다.
“몇 년 동안 블라인드에 빠져있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조명이 진하게 지나가는 날카로운 선은 성적인 쾌감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멋있게 보였다. 솔 르윗의 ‘세 개의 탑이 있는 구조물’은 원래 선으로만 이루어진 작품이었는데, 그것을 모두 블라인드 면으로 대체해서 표현해 봤다. 그러니까 원래의 작품이 가지고 있던 여러 속성이 달라졌다. 원본을 뒤집고 새롭게 해석한다는 의미다. 사실 블라인드 자체는 미약한 존재다. 반면 성(城)은 공동체의 구역을 배타적으로 구획하는 견고한 것이다. 허약한 블라인드로 된 ‘성채’는 이러한 배타적인 ‘공동체에 도전’하기 위한 작품이다.”

‘뒤집기’란 한 작품의 제목일 뿐 아니라 양혜규의 중요한 예술태도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미술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는 상식을 뒤집고 모든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볼 것을 제안한다.
양혜규의 작품은 이성의 이름으로 배제했던 감성적이고 토속적인 것들을, 효율성의 이름으로 거부 했던 모든 하찮은 것들을, 인간중심의 철학을 기준으로 잊고 있던 모든 자연적인 요소를 끌어들이려는 노력이다. ‘트랜스-휴머니즘’ ‘포스트-인터넷 예술’ ‘사변적 실재론’ 등 최근 인간의 의식이 더 이상 세계의 기준이 아니라는 새로운 사유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양혜규는 이런 최근의 미학적 논의의 중심에 서 있다.

4월에는 베를린과 벨기에에서 개인전 2번, 5월에는 비엔나 비엔날레. 6월에는 리옹 비엔날레 등 양혜규의 올 상반기는 이미 굵직한 전시들로 꽉 차있다. 서울에서의 짧은 일정을 후루룩 마치고 또 비행기를 탔다. 베를린의 작업실을 활용해 그는 젊은 작가들을 위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더듬더듬 길을 찾았던 자신의 초창기를 생각하며 그는 젊은 작가들을 위해 작업실을 기꺼이 오픈했다. “그저 작업실을 배울 때 비는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막 예술가의 길에 접어든 젊은 작가들에게 외국 체류, 그것도 양혜규 같은 작가 곁에서 작품을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일이다. ‘이익을 축적하지 않겠다‘는 신념에서 나온 예술적인 행위다.

글 이진숙 미술평론가 kmedichi@hanmail.net, 사진 삼성미술관 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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