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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나를 못 견디던 그때

중앙일보

입력

[매거진M] 20대, 우리가 고민했던 것

‘현피’ ‘키보드 워리어’ ‘세로 드립’이 무슨 말인지 아시는지. ‘소셜포비아’는 이런 말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누군가를 몰아세우는 데 열광하는 인터넷 문화를 스릴 넘치게 그린 영화다. 그게 다가 아니다. 이 영화는 20대 주인공들이 왜 그토록 공격적인 일에 매달리는지 그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데까지 나아간다. 날카로운 필치로 그린 우리 시대 젊은이의 초상이라 할 만하다. 한국영화아카데미(이하 KAFA) 장편영화 제작연구과정 프로젝트로 만든 첫 장편에서 놀라운 연출력을 발휘한 홍석재(32) 감독에게 그 이야기를 청했다.

-온라인 공간에서 벌어진 싸움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금메달을 놓친 선수 미니홈피에 악플을 남긴 여성이 있었다. 일부 누리꾼들이 그를 찾아내 공격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 여성의 대응이었다. 온라인상의 공격이 거세지고 신상 정보가 공개되면 보통 겁을 먹고 태도를 굽히게 마련인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에 더 흥분한 일부 누리꾼들이 ‘현피(‘현실’과 온라인 게임에서 이용자들끼리 싸우는 걸 뜻하는 ‘Player Kill’의 합성어. 인터넷 상의 싸움이 현실로 이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인터넷 용어)’를 추진했는데 성사되지는 않았다.”

-그 사건이 왜 흥미로웠나.
“현피하러 갔던 남자들 중 한 명이 그 상황을 실시간 인터넷 방송으로 중계하면서 당시 인터넷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그때 그 여성의 집 근처 PC방에 몰려간 남성들이 서로 얼굴을 보며 대화하는 대신, 각자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사이트에 댓글을 달며 이야기를 나누는 게 특히 인상적이었다. 요즘의 인터넷 문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건 같았다.”

-‘소셜포비아’ 역시 어느 군인의 자살 소식에 악플을 남긴 여성 레나(하윤경)를 응징하기 위해 모인 10~20대 남성들이 현피에 나서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현피에 나서는 부분까지는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이 있지만, 그 후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 나갔나.
“경찰 지망생인 지웅(변요한)과 용민(이주승)을 비롯한 무리가 레나의 집에 쳐들어가는데, 정작 레나는 죽어 있었다. 이 설정을 만들어 놓고 나서 뒷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쉽지 않았다. 레나가 왜 죽었는지 설명해야 하는데, 그럴 듯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사실 내가 이 영화에서 그리고 싶었던 건 ‘레나는 왜 죽었는가’가 아니라, ‘그 무리는 왜 현피에 나섰고, 레나의 죽음을 발견한 뒤 어떻게 행동하는가’였다. 시나리오를 함께 개발한 KAFA 동기 조슬예가 ‘등장인물 중 한 명이 극 후반에 레나와 똑같은 처지가 되면 어떨까’라는 의견을 낸 순간 실마리가 풀렸다. 그 인물이 레나와 같은 피해자가 되는 걸 보여주는 것으로 레나가 죽은 이유를 대신 설명할 수 있으니까. 더불어 실제 인터넷 세계의 속성을 보여줄 수 있는 선택이기도 했다. 인터넷 세계에서는 어리석은 짓이 끊임없이 반복되지 않나.”

-현피에 나서고 이를 인터넷에 떠벌리고자 하는 무리 이야기에 집중한 이유는.
“인터넷 문화를 겉핥고 싶지 않았다. 그 문화에 빠져 있는 관객은 ‘아, 이거 ‘레알’이다’라 느끼고, 그 문화를 모르는 관객은 ‘아, 인터넷 문화가 이런 거구나’ 체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려 했다. 현피를 하러 갔다 레나가 죽은 걸 본 뒤에도 용민을 비롯한 현피 멤버들은 자신들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아닌지, 레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레나를 죽인 진범, 그 유령 같은 존재를 찾아내는, 아니 만들어내는 데 몰두한다.”

-그 과정에서 지웅과 용민은 우연히 레나의 실체를 발견하는데.
“이 영화는 탐색의 플롯이다. 하드보일드 소설이 많이 취하는 구조다. 주인공들이 무언가를 찾아다니는데, 알고 보면 그것은 보잘것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주인공들이 그것을 찾아 헤매는 여정 자체와 그 길에 만난 풍경이 더 중요하다. 특히 주인공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졌을 때 중요한 진실에 가까워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노량진 학원가에서 경찰 시험 준비를 하던 지웅과 용민은 레나를 죽인 진범을 찾느라 어느 지방 대학으로 향하고, 거기서 레나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드보일드 소설과 탐색의 플롯이라…, 뭔가 오타쿠의 냄새가 풍긴다(웃음).
“맞다. 영화·만화·소설·게임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한다(웃음). 서브 컬처의 오타쿠라고 할까.”

-결국 이 영화는 20대 젊은이들이 왜 폭력적인 인터넷 문화에 빠지는지 그 이유를 찾는다. 그 대답이 되는 대사가 바로 “에고는 강한데 그 에고를 지탱할 알맹이가 없는 거, 요즘 애들 다 그래요”인 것 같은데.
“그 대목을 쓰면서 대학 시절 내가 느꼈던 핵심적 감정이 무엇인지 자문했다. 빨리 뭔가 되고 싶은데 현실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 그걸 못 견뎌했던 것 같다. 그 감정을 생각하며 대사를 썼다.”

-그 감정을 요즘 20대의 특징이라 말할 확신이 있었나.
“그렇다. 인터넷에 빠진 20대뿐 아니라 그 세대 전체가 ‘썸원(Some One, 어떤 사람)’이 아닌 ‘더원(The One, 단 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사회가 그걸 조장하는 측면도 있고. 20대가 인터넷 활동에 적극적인 건 온라인에서는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쉽다는 이유도 작용하는 것 같다.”

-그들이 공격적인 인터넷 문화에 빠진 이유를 그린 대목에서 연민이 느껴지더라.
“연민과 염증이 영화에 다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이 그들에게 느끼는 솔직한 감정이다.”

-30대에 접어든 당신도 그 세대라 할 수 있을까.
“그렇다. 이 영화는 자기반성과 고찰 끝에 나온 작품이다(웃음).”

-영화감독으로서 당신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주인공 한두 명의 캐릭터보다 그들이 속한 집단의 성향을 파고드는 것. ‘소셜포비아’도 그렇다. 대학교 1학년 때의 경험 때문에 그런 기질이 생긴 것 같다. A가 B의 잘못을 공론화해 B가 정학을 당했다. 그 뒤 다른 학생들이 A를 어려워하게 됐고, 결국 A도 학교를 떠났다. 그 뒤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어떤 집단에서 누군가 쫓겨나고, 그것이 또 다른 공동의 폭력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하게 되더라. 내 생각에 사람은 누구나 화살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사실이 서로를 긴장시키는데, 그 화살들이 한순간 한 사람에게 향하면 자신은 과녁이 아니라는 생각에 안전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계속 공공의 적을 찾아나서는 게 아닐까.”

-지금의 20대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커다란 존재가 되기를 욕망하게 하는 시대다. 꿈과 현실의 차이가 클수록 마음이 병들기 쉬운 것 같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당신은 그 차이를 인정할 수 있나.
“인정하기 힘들다(웃음). 영화를 만들고 나서 ‘더 잘 찍을 걸’ ‘더 잘 만들 걸’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개봉하고 나니 더 그렇다.”

글=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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