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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비야의 길!

아무리 바빠도 놀 시간은 있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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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

요즘 분초를 쪼개며 살고 있다. 봄 학기부터 박사과정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보 수집력과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50대 후반 학생이 20, 30대 젊디젊은 대학원생들과 같이 공부하려면 어떤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는 말 안 해도 잘 알 것이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공부에만 몽땅 쏟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국제구호와 개발협력 수업을 해야 하고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교장 일을 봐야 하고 약속한 특강을 나가야 한다. 게다가 3월 초 출간된 새 책 관련 행사까지 겹쳐 그야말로 눈썹을 휘날리며 다니고 있다. 일정 내용에 따라 빨간·파란·초록·까만색으로 분류해 달력에 적어놓는데, 이번 달과 다음 달은 칸칸이 빽빽한 총천연색 일정으로 화려하기 그지없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내가 숨 쉴 시간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일만 하고 살겠는가?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의사도 없다. 그래서 나는 틈틈이 논다. 오랜 경험을 통해 아무리 바빠도 놀 시간은 있고, 놀겠다고 마음먹으면 어떻게든 그 시간은 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요즘처럼 잠을 줄이고 분초를 쪼개야 할 때 가까스로 낸 시간에 노는 게 훨씬 재미있기까지 하다. 그러니 바쁜 일정 사이 어딘가 있을 틈새를 꼼꼼히 찾아낸 후 그 틈을 꽉 잡아서 짭짤하게 놀아야 한다.

 여러분은 이렇게 애써 찾아낸 ‘귀한 틈’에 뭘 하고 놀면 재미있는가? 각자 다 다르겠지만 나는 자연과 노는 게 제일 좋다. 신선한 공기와 환한 햇살, 매일매일 달라지는 꽃과 나무,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모습이 놀랍고 신기하다. 이 때문에 틈만 나면 집 바깥으로 나간다. 이번 달엔 한 달에 두 번 반드시 가던 야영을 한 번밖에 못 가 아쉽지만 그래도 일정 사이에 네다섯 시간 정도 틈이 생기면 집 앞 북한산에 오르고 두 시간 정도 나면 집 뒤 야산에 가고 하다못해 30분만 틈이 있어도 학교 교정을 한 바퀴 휙 돈다.

 지난 1~2주 사이 아기자기한 교정이 대형 꽃밭으로 변하고 있다. 지금은 영춘화, 개나리, 진달래, 목련, 산수유, 생강나무가 주인공이지만 곧 배꽃, 벚꽃, 철쭉, 영산홍, 붓꽃, 작약, 목단 등이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릴 거다. 나뭇가지는 까맣게 물이 오를 것이고 그 가지마다 꽃보다 예쁜 새잎들이 앞다퉈 나오면서 세상을 온통 싱싱한 연두색으로 물들일 거다.

 이런 반가운 봄꽃과 물오른 나무 사이를 잠깐 걷기만 해도 달궈진 머리가 식고 쌓였던 스트레스와 소소한 걱정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덕분에 어렵사리 틈을 내서 산책을 하면 그 30분이 그날 내가 보낸 최고의 시간이 되곤 한다. 이런 길을 일부러 시간 내서 걷기는커녕 예쁘게 핀 꽃에는 눈길 한번 안 주고 휴대전화에 코를 박고 가는 학생들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서 지난주부터 학생지도는 연구실이 아니라 교정에서 하기로 했다. 따뜻한 햇살 아래 꽃구경 하면서 애기를 나누면 훨씬 허심탄회하고 자연스러운 상담이 되지 않을까 했는데 내 생각이 적중했다. 어제도 자기는 국제구호 관련 일을 하고 싶은데 부모님은 안정된 교사가 되라고 하셔서 괴롭다는 4학년 학생과 교정을 걸으며 진로상담을 했다.

 이 친구, 처음 10분간은 준비해온 얘기를 낮은 목소리로 대본 읽듯 하더니 갑자기 밝고 높은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어머, 어느새 개나리가 이렇게 활짝 피었네요.”

 “음, 그건 개나리가 아니라 봄을 맞는 꽃, 영춘화야. 잘 봐. 같은 노란색 꽃이지만 영춘화는 꽃잎이 동그랗고 6장이지? 개나리는 길쭉하고 잎이 4장이야.”

 학생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자기는 4년 내내 개나리인줄로만 알았다며 신기해했다.

 조금 더 가니 이 학생이 또 목소리를 높였다.

 “와, 산수유도 활짝 피었어요.”

 “음, 그건 산수유가 아니라 생강나무야. 잘 봐, 둘 다 손톱만 한 노란 꽃을 달고 있지만 생강나무 꽃은 가지에 딱 붙어서 보송보송 동그랗게 모여 피었지? 나뭇가지도 매끈하고. 산수유는 가지 위에 꽃자루를 달고 그 위로 모여 핀단다. 아, 저기 하이에나처럼 얼룩덜룩 지저분한 나무 기둥 보이지? 저게 산수유야. 가서 자세히 볼까?”

 가는 길에 진분홍색으로 탐스럽게 핀 진달래를 한 주먹 따서 학생에게 건네주고 나도 먹었다. 학생 눈이 또 휘둥그래졌다.

 “놀라기는. 진달래는 먹는 꽃이야. 화전도 해먹잖아? 대신 진달래랑 비슷한 철쭉은 먹으면 큰일 나. 꽃잎 안에 반점이 많고 꽃받침이 끈적끈적하면 철쭉이야. 한번만 보면 금방 아니까 철쭉 필 때 다시 나오자. 오케이?”

 학생이 활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네. 좋아요. 그런데 교수님은 꽃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하하하. 내가 잘 아는 게 아니라 네가 너무 무심했던 거지.”

 꽃길을 걸으면서 이 학생은 말하기 어려웠을 가족사까지 털어놓으며 30분 정도 같이 울다가 웃다가 꼭 안아주는 아름다운 진로상담을 할 수 있었다.

 순전히 바쁜 일정 틈틈이 논 덕분이고, 활짝 핀 봄꽃 덕분이었다.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