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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순국 105주년 … 안중근 최후의 현장, 뤼순을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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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순국 105년을 맞은 안중근 의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1909년 단지동맹((斷指同盟) 직후의 안 의사.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우리 2000만 형제자매가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 자로서 유한이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고함’ 1910년 뤼순감옥에 면회 온 안병찬 변호사에게)

그곳은 가까이 있었다. 단지 우리가 잊고 지낼 뿐이었다. 지난 14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에서 중국 다롄(大連)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05년 전 순국한 안중근(1879~1910) 의사의 마지막을 찾아나선 길이었다. 한 시간 조금 지나 다롄공항에 내렸다. 서울~제주 정도의 비행 시간이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한 시간가량 서남쪽으로 달렸다. 랴오둥(遼東) 반도 최남단의 군사도시 뤼순(旅順)에 도착했다. 인구 32만 명의 뤼순은 동북아의 격변을 증언해온 곳이다. 1894년 청일전쟁 직후 주민 2만 명이 일본군에 학살됐던 비극의 장소다. 청나라는 이듬해 백은(白銀) 3000만 냥을 주고 뤼순을 되찾았지만 1897년 러시아에 다시 이곳을 앗겼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를 설치, 1945년 패망 때까지 지배했다. 도시 전체가 역사박물관으로 불리는 배경이다.

 특히 우리로선 일제 식민 통치의 아픔이 서린 곳이다. 1910년 3월 26일 안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만 31세의 불꽃 같은 젊음을 마감했다. 독립운동가 신채호(1880~1936)·이휘영(1867~1932) 등도 이곳에서 옥사했다.

 14일 오후 감옥에 도착했다. ‘뤼순일아감옥구지박물관(旅順日俄監獄舊址博物館)’ 현판이 눈에 띈다. 여기서 ‘아(俄)’는 러시아를 중국어로 음차(音借)한 아라사(俄羅斯)의 준말. 감옥은 71년부터 일본 제국주의를 고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88년 중국 중점문물보호단위(문화재)로 지정됐다.

 장즈청(張志成) 박물관장이 삼중(81) 스님을 비롯한 한국 방문단 9명을 맞아주었다. 지난 50여 년 사형수 구명운동을 해온 스님은 안 의사의 의연한 최후에 감동을 받아 90년대 중반부터 뤼순을 6차례 찾았다. 12년 만의 7번째 답사에서 스님은 안 의사의 유묵 ‘경천(敬天)’ 영인본을 박물관에 전달했다. 가톨릭 세례명이 토머스였던 안 의사의 신앙관, 즉 하늘을 공경하라는 메시지가 또렷했다.

뤼순감옥 건물(사진 위), 안 의사가 수감됐던 독방 내부(사진 가운데, 아래).

 안 의사 최후의 숨결이 스민 사형장으로 향했다. 붉은 벽돌 건물에 ‘안중근 의사 취의지(就義地)’ 팻말이 붙어 있다. ‘취의’는 ‘의(정의) 위한 죽음’이다. 안 의사 집안의 가훈인 정의가 떠올랐다. 황해도 해주의 유생이자 개화론자였던 안 의사 부친 안태훈(1862~1905)은 정의 두 글자로 가정을 일궜었다.

 사형장 한복판에 안 의사 영정이 놓인 의자가 있다. 처형 직전 어머니 조마리아(?~1927)가 보낸 흰 한복 차림이다. 교수대에는 올가미가 매달려 있다. 처형장은 예전에 박물관 창고·직원식당으로 사용됐다. 97년 다롄 상수도 공사도면이 발견되면서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됐고, 2006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됐다.

 교수대 맞은편에 안 의사가 어머니·아내 등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걸려 있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한 대목.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 인사를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아들의 사형 선고 소식을 듣고 “우리 모자의 상면은 이승에서 없기로 하자. 살아서 나라와 민족의 욕이 될 때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라” 했던 어머니였다. 장즈청 관장은 “해마다 40만 명가량 방문한다. 안 의사는 한국과 중국의 경계를 뛰어넘는 동북아의 큰 지사다. 26일 순국일에 기념식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처형실 곁에는 널찍한 전시관이 있다. 안 의사 흉상을 중심으로 양쪽 벽면 가득히 안 의사의 유묵(복사품)이 진열돼 있다. 일본인 간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써준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에 눈길이 멈춘다. 필체가 웅혼하다. 죽음을 초월한 영혼을 만나는 순간이다. 당시 안 의사는 지바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동양의 평화와 한·일 우호가 이뤄지고 내가 다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다시 만날 겁니다.” 이에 감화된 지바는 일본에 돌아가 안 의사 기념비를 세웠고, 이후 20년 동안 안 의사의 글씨와 영정을 모시고 매일 추모를 했다고 한다.

안 의사 사형장 내부.

 전시실 왼쪽으로 교도소 동관으로 가는 통로가 있다. 복도 양쪽 감방을 70~80m 정도 지나 다시 왼쪽으로 돌면 안 의사가 수감됐던 독방이 나온다. 장 관장이 평소 닫혀 있던 독방의 문을 열어주었다. 10㎡ 크기의 실내에 낡은 침대와 책상, 대소변통이 놓여 있다. 안 의사 수감 당시 모습을 재현했다. 박물관 측은 “책상 위의 벼루와 먹, 먹물을 담던 종지 두 개는 안 의사가 직접 썼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 의사가 감옥에서 쓴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원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哈爾濱)에서 한국 침략을 획책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탄환 세 발로 쓰러뜨린 안 의사는 11월 3일 뤼순감옥으로 이감됐다. 이듬해 3월 26일까지 144일간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자서전 『안응칠(安應七) 역사』(가슴과 배에 검은 점 7개가 있어 어릴 적 이름이 응칠이었다)를 완성했고, 동북아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은 『동양평화론』(미완성) 앞부분을 썼다. 동양평화론은 한·중·일 3국이 독립을 유지하며 서로 힘을 합쳐 근대문명국가를 건설하자는 내용이다. 3국의 이해관계가 극심하게 대립 중인 현재에도 유효한 외침이다. 선각자 안중근의 혜안이다.

 안 의사는 감옥에서 유묵 200여 점(현재 전해지는 것은 50여 점)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장부수사심여철 의사임위기사운(丈夫雖死心如鐵 義士臨危氣似雲)’이다. ‘장부는 죽을지라도 마음이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운 처지에서도 기풍이 구름 같다’는 뜻이다. 하얼빈 의거 사흘 전에 지은 ‘장부가’의 ‘장부가 세상에 처함에 그 뜻이 크도다’에 나타난 기상과 통한다. 다롄외국어대 김월배 교수는 “우리는 주로 하얼빈 의거를 기억하지만 안 의사의 진면목은 사상가·평화주의자였다. 집필·공판투쟁을 벌였던 뤼순이 중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사형장 외부 현판(사진 왼쪽), 뤼순감옥 공공묘지 자리(사진 오른쪽).
뤼순법원 건물(사진 위), 안 의사가 재판받던 법정 내부 풍경(사진 가운데), 1910년 2월 공판 모습(사진 아래). 맨 아래 오른쪽이 안 의사다.

 15일 오전 뤼순법정을 찾았다. 현재 명칭은 ‘뤼순일본관동법원구지(旅順日本關東法院舊址)’. 2층 대리석 건물이다. 안 의사가 하얼빈 의거의 대의를 설파했던 곳이다. 2층 고등법원 건물로 올라갔다. 안 의사는 원래 1층 지방법원에서 1심을 받아야 했지만 방청자가 몰려 300석 규모의 고등법원에서 공판이 진행됐다.

 재판정 맨 앞, 왼쪽 끝자리에 앉았다. 안 의사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105년 전의 광경을 상상했다. 모두 6차례 열린 형식적인 공판에서 안 의사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1910년 2월 12일 5차 공판에서 이렇게 외쳤다.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

 사형선고는 이틀 후 내려졌다. 안 의사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동양평화론 완성을 조건으로 상고를 포기했다. 재판을 참관한 영국 기자 찰스 모리머는 이렇게 썼다. “그는 순교자가 될 준비가 돼 있었다. 기꺼이 아니 열렬히 자신의 귀중한 삶을 포기하고 싶어 했다. 영웅의 왕관을 손에 들고는 늠름하게 법정을 떠났다.” 『안응칠 역사』의 한 대목도 절절하다. “나는 과연 큰 죄인이다. 다른 죄가 아니라, 내가 어질고 약한 한국 국민 된 죄로다.”

 뤼순법원은 일본 패망 이후 일반병원으로 사용됐다. 92년 설립된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이사장 홍일식)이 국민 성금으로 건물을 사들였고, 2003년부터 옛 모습을 복원·전시하고 있다. 2층 중앙에 안 의사 추모실도 마련했다. 이곳 정춘매 주임은 “한국인 3000여 명 등 매년 5000여 명이 찾아온다”고 했다.

 일제는 안 의사의 시신도 경계했다. 당시 법률에 따르면 유족이 요구하면 돌려줘야 했으나 이마저 묵살하고 유해를 감옥 공공묘지에 매장했다. 안 의사 묘소가 항일투쟁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한 정략적 판단에서였다. 안 의사 유해 찾기가 벽에 부닥친 가장 큰 이유다.

 안 의사 유해가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한 곳을 찾아갔다. 뤼순감옥에서 1.2㎞ 정도 떨어진 둥산포(東山坡)다. 1907~42년 뤼순감옥 묘지로 사용됐던 지역이다. 중국 정부는 2001년 이곳에 ‘뤼순감옥구지묘지’ 비석을 세우고 문화재로 관리하고 있다. 2000㎡ 크기의 묘역에는 무심한 나무들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안 의사의 최후 유언이 들려오는 듯했다.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나의 뼈를)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해방의 만세를 부른 지 올해로 70년. 안 의사는 지금도 그렇게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최춘석 국가보훈처 주무관은 “매장 추정지에 대한 지표조사를 중국 정부에 요청했다. 남북 공동조사를 추진하고, 민간단체와 공조해 답보 상태였던 유해 발굴에 속도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S BOX]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게’ … 서예로 만나는 안 의사

삼중 스님(오른쪽)과 서예가 현병찬(가운데)씨가 안 의사 시를 뤼순감옥박물관에 전하고 있다.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게’.

 안중근 의사가 1908년 항일 의병을 이끌면서 동지들을 격려한 즉흥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한문 원문은 ‘망수동포서유혈 막작세간무의신(望須同胞誓流血 莫作世間無義神)’이다. ‘의리 없는 귀신’이란 대목이 묵직한 울림을 준다. 한글서예가 현병찬(73)씨가 즐겨 쓰는 구절이다. 그는 이 ‘애국시’를 지난 14일 뤼순감옥 측에 전달했다. 이튿날 뤼순지방법원에는 안 의사의 ‘장부가’를 쓴 작품도 기증했다.

 26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안 의사를 기리는 서예전이 열린다. 28일까지 사흘 동안 세종한글서예큰뜻모임 소속 서예인 50여 명이 안 의사 사상의 결정체인 ‘동양평화론’을 내놓는다. 각자 개성 넘치는 필체로 ‘동양평화론’을 정성껏 옮겨 적었다. 일종의 공동 창작이다. 현씨는 “ 한글 세대에게 안 의사를 알리자는 마음에서 회원들이 함께했다”고 말했다.

 삼중 스님도 개막 당일 국회에서 안 의사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하는 특강을 연다. 현실 정치권에 대한 당부도 곁들일 예정이다. 스님이 바라본 안 의사를 정리한 동화 『영웅 안중근의 마지막 이야기』와 성인 대상의 『코레아 우라(만세)』도 발간한다. 그는 “요즘 많은 이가 나만을 생각하며 산다.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게’ 한 구절만 기억해도 좋겠다”고 했다.

뤼순=글·사진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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