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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의사 유해 발굴 위해선 … 한·중 연합기구 가동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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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김월배(왼쪽) 다롄외국어대 교수와 판마오중 뤼순감옥 전 연구진열부 주임.

마치 형제 같았다. 지난 3년간 책상을 마주하며 시간을 함께해 왔다. 한국과 중국이란 국적을 뛰어넘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였다. 다롄외국어대 김월배(48) 교수와 판마오중(潘茂忠·61) 전 뤼순감옥 박물관 연구진열부 주임이다. 둘은 지난해 초 중국에서 『안중근은 애국-역사는 흐른다』를 한·중 2개 국어로 함께 내기도 했다.

 둘은 이른바 ‘안중근에 빠진’ 연구자다. 김 교수는 2005년 하얼빈을 시작으로 지난 10년간 중국에서 생활해 왔고, 1975년 뤼순감옥에 입사한 판마오중은 지난해 정년퇴임하기까지 39년 동안 안 의사 관련 자료를 수집·정리해 왔다. 김 교수는 지난해 한국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공저)를 냈고, 판마오중도 안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자료집 『백년의 얼 충혼 안중근』(공저·2010)을 발간했다.

 -안 의사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있다면.

 ▶김월배=2005년 하얼빈에 안중근 동상 건립 준비 작업을 하면서부터였다. 동상은 이듬해 1월 건립 11일 만에 철거됐다. 당시 한·중·일 3국의 정세가 복잡했다. 현재 부천 안중근공원에 있는 그 동상이다. 이때부터 안 의사 연구에 매달리기로 결심했다. 하얼빈 공대 중·한연구소 등에서 7년간 있었고, 안 의사 유해 발굴에 전념하기 위해 뤼순으로 건너왔다.

 ▶판마오중=어렸을 때부터 안 의사 얘기를 듣고 자랐다. 할아버지께서 “이름을 모르는 조선인이 일본인 큰 관료(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난다. 스물한 살에 뤼순감옥에 들어오면서 안 의사를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79년 관련 논문을 처음 썼다. 안 의사는 국적을 넘어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서울 효창공원에 있는 안중근 의사 가묘(假墓·왼쪽). 1946년 김구 선생 주도로 조성됐다. 그 오른쪽은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묘다. [중앙포토]

 -안 의사 유해 발굴은 가능성이 희박한데….

 ▶김=지금도 낮은 편이다. 그간 한국·북한·중국 등에서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만둘 일은 아니다. 다행히 올해 한국 국가보훈처에서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초 유해 매장 추정 지역에 대한 지하 탐지 조사를 벌이기로 발표했다. 기대감이 높아진 시점이다. 무엇보다 한·중 연합기구가 가동돼야 한다.

 ▶판=한국의 단독 작업으로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 양국의 학자·기관들이 뜻을 모아 중국 중앙정부의 발굴 허가를 받아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2008년 조사 때 성과가 없어 또다시 승인을 받기는 매우 힘겨울 것이다. 안 의사 고향이 황해도 해주다. 북한과도 협의해야 한다. 시간을 갖고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

 -안 의사 유해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

 ▶김=원통형 관에 매장됐던 일반 죄수와 달리 안 의사는 일자형 소나무 관에 묻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표 투과 레이더 조사를 하면 그런 관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손자 안웅호, 증손자 안도용(토니 안), 조카 안춘생 등의 DNA가 있기에 유전자 비교도 가능하다. 또 관에서 안 의사의 이름이 적힌 약병이나 안 의사가 사용했던 십자가가 나오면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다.

 ▶판=앞으로도 찾아야 할 관련 자료가 많다. 중국·러시아·일본 등에 흩어져 있다. 예컨대 일본은 패망 직후 뤼순감옥 문서를 모두 불태웠는데, 그 잔해가 다롄당안관(문서보관서)에 보관돼 있다. 당시 발간된 신문 중 아직 공개되지 않은 것도 있다. 모든 학술적·외교적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뤼순=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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