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여울, 그림을 읽다 | 그림 속 유머의 미학 - 삶은 아름다우니 웃어라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월간중앙] 지위와 명예의 근엄함으로 포장된 속살의 해학 드러내고, 일상에서 스치고 간 익살맞은 장면 통해 삶의 즐거움을 깨닫는다

그림은 생활 속 유머러스한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삶의 즐거움을 되새기게 해준다. 헨리 레이번 작 <스케이트 타는 목사님>(1790년) / 사진제공·정여울

‘웃지 않고 보낸 날은 허탕친 날’이라는 프랑스 속담을 생각하면, 나는 왠지 억울해졌다. 웃음은커녕 희미한 미소조차 짓지 않은 채 보낸 날이 얼마나 많은데, 웃지 않고 보낸 날은 헛되이 날려버린 날이라니. 웃지 않는 게 무슨 죄라도 된단 말인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웃음이 간절해진다. 어린 조카들의 코믹한 사진을 항상 휴대폰에 저장해놓고 침울해질 때마다 꺼내보면서 키득키득 웃곤 하는 나를 발견한다. 웃음은 감정의 나락으로 떨어지려 하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무의식의 방어기제였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미소로 우울한 감정을 치유하고 있었다. 이제 갓난아기처럼 해맑게 웃을 수는 없는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아기들의 미소를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그 천진난만한 미소를 따라 하게 된다. 뉴스를 시청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현대인들에게는 더더욱 웃음이 간절해진다.

나는 늘 희극의 가벼움보다는 비극의 처절함에 한 표를 던지는 사람이었다. ‘잘 웃는 사람들’, ‘잘 웃기는 사람들’에 대한 콤플렉스도 심했다. 하지만 ‘웃프다’는 신조어처럼 삶 자체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희비극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사람을 울리기보다 웃기기가 훨씬 더 어려운 일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미소를 머금게 하는 장면들을 볼 때마다 그 사소한 유머에 진심으로 커다란 감사를 느낀다. 자연스레 웃는 법을 잊어버렸던 나는 뒤늦게 웃음의 소중함을 배우고 있다. 이제는 안다. 참된 웃음을 배우는 것이 눈물의 의미를 깨닫기 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슬픔은 자기의 내부로 끝없이 파고드는 감정의 중력이다. 슬픔과 어울리는 단어들은 ‘깊이’, ‘빠져든다’, ‘아래로’, ‘헤어나올 수 없다’ 같은 무거운 느낌을 준다. 슬픔은 주체를 스스로 만든 감정의 감옥에 가둔다. 그리하여 슬픔에 빠진 사람들 곁에는 거대한 장벽이 느껴진다. 슬픔에 빠졌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가까이서 바라보게 된다. 슬픔에 빠졌을 때 오히려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상태로 빠진다. 그것이 슬픔이 갖는 부정적 내향성이다. 그런데 웃음은 잠깐 ‘자기’라는 존재를 불현듯 놓아버리는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현실, 나의 책임이 무엇이고, 내 슬픔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 이 모든 것을 그 순간 잠깐 확 놓아버리는 것이다. 웃음은 자기를 잊음으로써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마력을 가졌다. 웃음이 가진 긍정적 외향성이다.

코믹 릴리프: 미소 속의 위안 찾기

책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 책이 되어 버린 역사학자의 초상화는 ‘책만 읽는 바보’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풍자했다. 주세페 아르침볼도 작 <도서수집가>(1566년) / 사진제공·정여울

돌이켜보면 인간의 생로병사에서도 울음보다 더 늦게 터지는 것은 웃음이다. 태어나자마자 아기가 하는 일은 우렁차게 우는 것이다. 엄마의 양수 속에서 편안히 헤엄치며 지내다가 세상에 나왔을 때 아기가 맨 처음 느끼는 것은 고통이 아닐까. 웃음은 아기가 어느 정도 바깥세계의 동향을 감지했을 때 나오는 반응이다. 웃는 부모의 얼굴 표정을 따라 하면서 아이는 웃는 법을 배운다. 저절로 터져 나오는 울음은 배울 필요가 없지만, 웃음은 그 공동체의 감수성을 배워야 알 수 있는 문명의 관습이기도 하다. 어른이 되면 사회적 필요에 따른 ‘사교적 웃음’이 더욱 많아지기 때문에 진심으로 웃을 일은 더욱 적어진다. 아무도 당신을 보고 있지 않을 때 당신이 큰소리로 웃을 수 있다면, 그때야말로 진정으로 웃고 있는 순간인 셈이다.

그림을 볼 때도 예전에는 비극적인 스토리가 담겨 있는 작품을 좋아했지만, 언제부턴가 점점 해학과 풍자가 있는 그림들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미소 찾아 삼만리’를 떠나게 된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스케이트 타는 목사님>이었다. 이 그림에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스케이트 타는 목사님>을 알게 된 그날 이후로 나는 자꾸 ‘유머러스한 그림’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인간은 자신의 코 바로 밑에서 ‘미소’라는 이름의 행복을 찾을 수 있으면서 왜 그토록 애타게 ‘또 다른 행복’을 찾아 다니는 것일까?

스케이트 타는 목사님은 미끌미끌한 빙판 위에서 전혀 힘들지 않은 듯, 어쩌면 자신이 스케이트를 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는 듯한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 놀라운 평온함, 목사님의 얼굴에서 은근히 배어 나오는 장난기, 그리고 그가 입은 엄격한 성직자의 복장이 흥미로운 불균형을 이룬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몸소 겪어본 사람은 이 그림의 소중한 정서를 더욱 간절히 느끼게 된다. 그의 경이로운 스케이팅 장면을 보면 기나긴 겨울이 꼭 춥고 외롭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우아하면서도 확신이 어린 그의 몸놀림은 그림 전체에 절제된 활기를 부여한다. 스케이트를 전혀 못 타는 나 같은 사람도 이 그림을 보면 왠지 스케이트를 아주 잘 탈 수 있을 것 같은 유쾌한 기분에 감염된다. 스코틀랜드의 혹독한 겨울을 묘사하는 저 배경화면 속의 황량한 산들과 대조되는 그의 멋진 스케이팅은, 황량한 벌판 위에서도 아름다운 몸놀림으로 이 겨울의 우울증을 날려버리는 인간의 작지만 위대한 승리를 보여준다. 배경은 황량하기 그지없는데 그는 마치 아늑한 배를 타고 저절로 떠 있는 듯 유쾌하게 얼음 위를 질주한다.

이 그림이 내뿜는 절제된 유머의 기운에 반해서 그림 설명을 자세히 봤더니, 그림 속의 인물은 지역사회의 존경을 잔뜩 받고 있는 목사님이었다. 그 이름도 찬란한 로버트 워커 ‘경(The Reverend)’이 너무나도 작고 앙증맞은 발로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모습은 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웃지도 않고 찡그리지도 않은 채 ‘이게 뭐 대수라고’ 하는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스케이트를 타는 목사님의 모습에는 삶의 무거움과 온갖 골치 아픈 업무들을 이 순간만은 완전히 잊어버린 자의 여유와 내공이 묻어 있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마침 살을 에는 추위와 휘몰아치는 바람에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였기에, 이 작품은 더욱 따뜻한 ‘영혼의 난로’처럼 느껴졌다. 나는 온몸으로 이 그림이 전해주는 웃음에 치유의 힘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가 평소 근엄한 표정으로 신도들에게 설교하는 모습도, 무려 다섯 명의 아이를 둔 아버지라는 점도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그림이 자아내는 유머의 본질은 바로 그 모순과 불균형에 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랍도록 단정하고 세련되게 정제된 그의 복장이 보인다. 여기저기 다이내믹한 소용돌이가 그려진 빙판은 그가 힘차게 질주한 스케이팅의 흔적을 보여준다. 근엄함과 경건함의 상징인 목사님이 애들이나 타는 스케이트를 이토록 우아하고 귀염성 있게 즐기고 있다는 ‘언밸런스’한 상황이 관객을 웃음짓게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런 ‘감정의 해방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시간. 나이와 성별마저 잊고 ‘순간의 산뜻한 희열’ 속으로 정직하게 몸을 던지는 건강한 오락의 시간 말이다.

유머, 최고의 우울증 치료제

유머는 화폭을 벗어나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유머에 서툰 영국인들의 스트레스를 위로하는 듯한 문구를 내건 커플 매니지먼트 광고가 런던의 한 지하철 광고판에 걸려 있다.

그림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나는 작은 웃음의 기회를 엿본다. 런던 지하철역에서 만난 ‘커플 매니지먼트’ 광고가 그랬다. ‘저는 정말 유머 없는 사람이 좋아요. 정말이라니까요’라고 속삭이며 웃는 저 여인은 지금 ‘짝’을 찾고 있다. 유머 없는 사람이 좋다는 여성의 고백이 커플매니지먼트사 광고가 될 수 있다니! 나는 이 광고를 보며 한참 웃었다. 영국 사람들도 유머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한가 보다. ‘유머 감각이 없다’는 콤플렉스를 나만 앓고 있는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지었다. 특히 남자들은 ‘여자들을 웃겨야 한다’는 강박이 더 심한 경우가 많은데, ‘유머러스한 남자’가 각광받는 현시대의 풍토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머라는 것이 꼭 엄청난 화술과 우스꽝 스러운 행동으로만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소한 장난을 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미소지을 수 있다. 진정한 웃음의 비밀은 ‘유머 자체의 밀도’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웃을 수 있는가’라는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닐까.

체코 프라하의 카프카 박물관 마당에는 ‘오줌싸개’ 동상은 소년의 ‘그것’에 익숙한 우리에게 신선한 웃음을 선사한다. / 사진제공·정여울

카프카를 떠올리면 우리는 왠지 무겁고 진지하고 심각한 그의 작품 분위기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카프카의 본질은 ‘유머’라는 글도 읽은 적이 있지만, 나는 그 글조차 너무도 심각하게 느껴져서 당황스러웠다. ‘나 혼자 카프카의 유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당시의 나에게는 카프카의 작품이 너무 아프고 시리고 갑갑하기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심각하지만 매혹적인, 무겁지만 아름다운 카프카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나는 프라하의 카프카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카프카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나보다도 먼저 웃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이 웃고 있는 것은 카프카 박물관 앞에 서 있는 오줌싸개 동상 때문이었다. 우리는 오줌싸개 '소년’의 동상에는 익숙해져 있지만,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서로 마주 보며 그야말로 ‘엉덩이를 흔들흔들’ 춤을 추며 ‘오줌싸기의 축제’를 벌이는 장면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공짜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아주 가까운 길이 ‘거리의 예술’ 속에 있다는 사실이 참 좋았다. 오줌싸개 동상의 흥겨운 춤사위 덕분에 카프카의 슬픔도, 카프카의 분노도 조금은 수그러드는 것 같아 가슴이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결혼잔칫집 하객들의 흥겨운 모습이 피곤에 지친 듯한 신랑 신부와 대조적이다. 피터 브뤼헬 작 <농가의 결혼식>(1620년) / 사진제공·정여울

예전에는 피터 브뤼헬의 그림이 ‘우습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지금은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미소가 절로 나온다. 그의 유머 코드를 나는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나 보다. 결혼식이라는데 정작 신랑 신부는 주인공이 아니다. 신부는 취했는지 피곤한지 몽롱한 상태로 보이고, 결혼식을 진짜로 즐기고 있는 사람들은 ‘별 상관 없는 손님들’이다. 사람들은 각자 흥에 겨워 신나게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리고, 춤추고, ‘작업’을 걸기도 한다.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흥에 겹다. 인생이란 원래 이렇지 않은가? 잔칫집에서 진짜 주인공은 신랑이나 신부가 아니라 가장 많이 퍼마신 객이라는 아이러니. 나도 왠지 저 잔칫집에 가본 느낌이 든다. 타고난 공감의 능력을 한층 끌어올리는 이 작품은 너무나 ‘토속적’이어서 각자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한다. 유럽의 잔칫집도 그랬구나, 우리네 잔칫집도 그렇던데. 그림 속 인물들과 술 한잔 기울이고 싶게 하는 그런 그림이다.

찰나의 순간에서 포착한 풍자적 코드

과일과 채소, 곡물 등 정물화 소재를 이용해 초상화를 그려낸 재치가 돋보인다. 주세페 아르침볼도 작 <여름>(1563년) / 사진제공·정여울

아르침볼도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시리즈를 보며 나는 ‘정물화’와 ‘초상화’에 대해 완전히 다른 시선을 갖게 되었다. 정물화는 말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물(still life)’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그가 그린 그림 속의 과일과 꽃과 채소들은 살아 움직이며 화폭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다. 그의 사계절 연작은 초상화이기도 했는데, 봄여름가을겨울은 단지 계절의 흐름이 아니라 인생의 은유이기도 하다는 점을 그의 작품은 열정적으로 보여준다. 봄의 싱그러움, 여름의 화창함, 가을의 풍성함, 겨울의 쓸쓸함은 인간의 생로병사의 알레고리처럼 다가온다.

초상화이기도 하고, 정물화이기도 하며, 나아가 우리 인생의 스토리텔링을 담은 그림이기도 한 사계절 연작을 보면서 나는 ‘시간이 간다’는 것이 꼭 슬픈 것만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왕의 지원을 받아 생계를 꾸리는 궁정화가였지만, 왕의 초상화조차 저 거침없는 ‘정물들의 콜라주’로 그려낼 정도로 상상력은 물론 열정과 용기가 넘치는 화가였다. 그의 그림 속에서 시간이 가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유머의 기원인 것 같다. 그의 그림 속에서는 가을 낙엽과 겨울의 마른 가지조차도 왠지 따스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아르침볼도의 꽃잎, 이파리, 뿌리, 열매들은 시간이 간다는 것, 인생이 저물어간다는 것, 삶이 끝나간다는 사실 앞에서도 세상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화가의 친밀한 시선이 녹아 있다.

궁정화가는 주로 왕가나 귀족들의 초상화를 가장 많이 의뢰받았지만, 주세페 아르침볼도는 그 지루한 ‘높으신 분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도 기발하고 창조적인 탈출구를 찾아냈다. 아르침볼도는 막시밀리안 2세의 공식 초상화 화가로 일하던 시절 역사학자 볼프강 라지우스(Wolfgang Lazius)의 초상화를 그렸다. 아르침볼도는 ‘책에 미친 역사학자’를 이렇게 코믹한 모습으로 그려냈다. 책에 미친 사람들을 가까이서 본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자마자 금세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간서치(看書癡: 책만 읽은 바보)들은 정말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나도 한때 이런 모습으로 비친 적이 있을 것이다. 가끔 지금도 ‘정상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모습으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책을 모으고 읽고 보관하는 일에는 모종의 광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간서치들은 책을 모으고, 책을 아끼고, 책장을 넘기고, 책 속에 빠져 있느라 자신의 모습이 곧 아무렇게나 쌓인 책더미처럼 보인다는 사실도 모른다. 이것은 ‘책의 내용보다도 책이라는 사물 자체에 대한 소유욕’에 눈이 먼 사람을 풍자한 그림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내 눈에 비친 이 사람은 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같다. 책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온몸이 책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책에 비친 바보의 모습은 우스꽝스럽지만 아름답다. 꽃과 열매와 야채들의 자유분방한 콜라주로 그림을 그렸던 아르침볼도는 이번에 ‘책’이라는 세포로 인물의 생김새를 완성한다. 이 그림을 향해 짓는 미소는 ‘나를 웃기는 사람들’을 향한 미소가 아니라 ‘나 자신이 웃음의 대상’이 되었을 때의 미소다. 나도 책에 미친 바보가 되고 싶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은 채,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그저 책에 대한 사랑만으로도 완전한 행복을 느끼는 ‘책바보’가 되고 싶다. 나는 이 그림에 무한한 친밀감을 느낀다. 내가 되고 싶었던 존재, 내가 꿈꾸던 삶,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압축한 ‘우리들의 자화상’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일상의 순간에서 포착한 웃음코드

한 손에 술잔을 들고 불콰한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만연한 술꾼의 모습이 익살맞다. 프란스 할스 작 <행복한 술꾼>(1630년) / 사진제공·정여울

보자마자 폭소를 터뜨리게 되는 그림이 있다. 프란스 할스의 <행복한 술꾼>을 봤을 때다. 그림에서 술 냄새가 확 끼쳐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사람 때문에 화면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 분명히 정지된 그림인데 비틀비틀 동영상을 찍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핸드 헬드 카메라에서 초점이 흔들려버린 그 느낌이 좋았다. 가끔 그 술 취한 아저씨의 그림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오곤 했다. 그림만 보고 있어도 멀쩡했던 내가 점점 취기가 오르는 느낌이 좋았다. 프란스 할스의 다른 그림들도 이렇게 ‘취한 사람’이 많이 나오는데, 그는 가벼운 도취와 나른한 취기 속에서 인간의 숙명적인 본질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사람을 슬픔에 잠기게 하는 그림이 80%라면 깔깔 웃게 하는 그림은 1%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프란스 할스가 더욱 좋아졌다.

오른쪽 손으로는 손사래를 치면서 왼쪽으로는 화이트와인이 반쯤 담긴 잔을 들고 있는 그의 표정은 도취와 환희 그 자체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걱정도, 과거에 대한 어떤 미련도 없어 보이는 그의 해맑은 도취는 보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 오르게 만든다. 앞에 있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취중 대화를 하는 듯한 ‘행복한 주정뱅이’의 모습은 짧은 시간 안에 모델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자연스런 모습을 단기간에 포착해야 했을 화가의 민첩함과 융통성을 상상하게 만든다. 술 취한 사람들의 그림이 유난히 많은 프란스 할스의 작품 세계는 특별한 스토리보다 ‘순간에 휘발되는 미소’에 온 힘을 집중한다. 프란스 할스는 우여곡절 많은 인생에서 ‘빛나는 시간’은 바로 이런 시간, ‘시시껄렁해 보이지만 아주 작은 미소로 세상이 잠시나마 환해지는’ 바로 그 시간 속에 있음을 알았던 것이 아닐까.

눈짓을 교환하고 숨겨둔 카드를 빼내는 이들 사이에서 순진무구하게 자신의 패에 집중하고 있는 남자(오른쪽)의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조르주 라 투르 작 <음모를 꾸미는 사기꾼들>(1634년) / 사진제공·정여울

17세기 서유럽의 일상사를 그린 그림들에서 도박, 와인, 그리고 서로 희롱하는 남녀들은 마치 ‘욕망의 3종 세트’처럼 함께 나타나곤 한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위에 이 모두를 비웃는 희대의 사기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그림은 서로 속고 속이는 도박의 유희적 본질을 보여준다. 화면 중앙에서 화려한 깃털 장식을 단 여인의 앙큼하면서도 살짝 겁먹은 듯한 표정은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이들을 구워삶을 수 있을까’하는 그녀의 속내를 비춰준다. ‘이 사람들한테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지’하는 의지, ‘이들 중 하나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빛도 함께 섞여 있는 그녀의 새하얀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등불이 되어 화면 전체를 비추는 중심의 광원(光源)이 되고 있다. 숨겨뒀던 에이스 패 두 장 중 모양이 같은 클로버 에이스를 살짝 쥐고는 ‘이건 몰랐지롱!’ 하는 듯한 남자는 이 모든 상황을 위에서 바라보는 자처럼 보인다. 오른쪽에서 현란한 장식으로 치장한 옷을 입은 남자가 바로 ‘독박’을 쓰게 될 당사자처럼 보인다. 그는 속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속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하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패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 테이블에 모인 사람들은 그를 벗겨 먹기 위해 철저히 ‘공모’하고 있는데, 그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녀까지 이 사기극에 동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관객에게 방백을 하는 듯한 왼쪽 남자의 장난기 어린 표정이 재미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한 차원 더 위에서 바라보는 것은 바로 ‘화가’다. 테이블 위에 자신의 돈을 걸지 않은 사람만이 이 ‘사기의 매트릭스’를 벗어나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뛰는 자 위의 나는 자들’을 보는 최후의 시선은 바로 관객에게 돌아간다. 누군가가 사기를 치는 동안, 서로 속고 속이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관찰자들. 그리고 그 관찰자들을 또 다른 시선으로 지켜보는 제 2, 제 3의 관찰자들. 이런 시선의 중첩은 단지 ‘도박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알레고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속고 속이는 사람들, 그러면서 자신이 속고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속고 있지 않아’라고 착각하는 사람들. 그림을 바라보면서 반사적으로 흘러나오는 단순한 웃음은 이렇게 또 다른 성찰을 향한 사유의 등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삶을 아름답게 하는 웃음의 힘

보기에도 민망한 이 벽화는 옛 소련과 동독 지도자들의 정치적 제휴를 기념하는 동시에 풍자했다. 베를린장벽 보존 구간인 ‘이스트 사이드갤러리’에 있다. 드미트리 브루벨 작 <신이시여, 이 지독한 사랑을 도우소서>(1990년) / 사진제공·정여울

시선을 조금 옮겨보자. 점잖게 빗어 넘긴 머리에 말끔한 검정색 슈트 차림의 두 남성의 짙은 키스신이 보는 이를 민망하게 만든다. 그림 아래에 적힌 기도문 같은 제목이 애틋하기 그지없다. ‘신이시여, 이 치명적인 사랑을 계속하게 도와주소서’. 이 그림에 얽힌 구구절절한 사연은 사람들을 한 번 더 포복절도하게 한다. 이 그래피티 페인팅은 드미트리 브루벨이라는 아티스트의 작품이다. 원래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와 호네커 동독 수상의 정치적 제휴를 기념하는 동시에 유머러스하게 풍자한 사진을 그래피티 아트로 옮긴 것이었다. 이 작품의 별명은 ‘우정의 키스(fraternal kiss)’인데, ‘우정의 키스’치고는 너무도 격렬하고 간절한 두 사람의 포즈 때문에 이 그림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이 포즈를 동성끼리 흉내 내며 배꼽잡곤 한다.

사라진 두 국가(소련과 동독)의 지도자가 서로 치명적인 키스를 하는 이 그림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두 나라의 문화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면서 이제는 ‘유희의 대상’으로 대중이 사랑하는 일종의 팝아트로서 각광받게 되었다. 두 정치가의 심각한 만남과 역사적인 협상의 장면을 이처럼 우스꽝스런 풍자의 대상으로 만든 것은 사진작가 보쓰였고, 그 유머를 ‘거리의 미술’로 승화시켜 세계적인 작품으로 대중화시킨 것이 브루벨이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정치’라는 심각한 커뮤니케이션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유머러스한 풍자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그림 속의 두 인물은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그렇게 심각하게만 보려고 하지마, 우리 정치인들도 이렇게 때로는 열정적이라고.’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유머를 완성하는 것은 관객이다. 유머러스한 그림은 일단 관객들을 무장해제시킨다. 유머러스한 작품들은 그림 속의 피사체를 모방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웃음이 담뿍 담긴 그림을 통해 관객들은 슬픔의 한가운데서 피어나는 웃음의 따스함을 이해하게 된다. 나를 웃게 하는 모든 그림은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삶은 아름다우니, 웃어라. 아니 자꾸 웃다 보니, 삶이 아름다워지네. 그러니 차라리 누군가 웃기기 전에 먼저 스스로 웃어버려라. 그러면 우리의 삶도 아름다워지리라.

글=정여울 - 1976년생. 문학평론가. 서울대 독문과 및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마침. 2004년 ‘문학동네’로 등단. 저서로는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잘 있지 말아요><마음의 서재><시네필다이어리><정여울의 문학 멘토링> 등이 있다.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