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돈·인맥이 따낸 '의회 연설'… 힘에서 밀린 한국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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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미국 의회 연설을 저지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미국의 한인단체 회원들이 18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마이크 혼다 연방 하원의원(가운데)과 함께 기자회견을 했다. 왼쪽은 김동석 시민참여센터 상임이사, 오른쪽은 이정실 워싱턴지역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 회장. [사진 시민참여센터]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추진 중인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이 기정사실화하며 한국의 대미 외교가 위기를 맞고 있다. 과거사 바꾸기를 시도해온 아베 총리의 의회 연설이 허용되면 한국 외교는 혼내는 목소리만 컸을 뿐 정작 미 정부·의회를 상대로는 힘을 쓰지 못하는 외교력 부재를 드러냈다는 비판을 부를 전망이다.

 17일(현지시간) 아베 총리의 의회 연설을 결정하는 존 베이너 하원의장 측과 의회 연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 측은 아베 총리 연설에 대한 답변을 피했다. 지난 4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베이너 하원의장을 만나 아베 총리의 의회 연설을 놓고 과거사 사과 필요성을 거론했을 때도 베이너 의장은 이 대목에서 묵묵부답했다. 로이스 위원장실 인사는 “이 같은 형태의 초청을 결정하는 권한은 하원의장에게 있으며 외교위원장 사안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나 과거 외국 정상의 합동 연설에 의회가 반발하며 무산된 사례는 없지 않았다. 1987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합동 연설은 당시 보수파가 반발하며 없던 일이 됐다.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일본 총리의 합동 연설도 헨리 하이드 하원 외교위원장이 반대 서한까지 써 무산됐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당의 마이크 혼다 하원의원 정도를 제외하면 반대 목소리를 내는 의원을 찾기 어렵다.

존 베이너

 워싱턴을 찾는 외국 정상이 여야 상·하원 의원의 기립 박수를 받는 합동 연설은 미국이 제공하는 최고의 예우다. 그래서 매년 각국 정상이 미국을 방문하지만 1874년 칼라카우아 하와이 국왕 이후 지난 3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까지 합동 연설은 115차례밖에 없었다. 여기엔 미국 인사의 연설까지 포함돼 해외 정상의 연설은 이보다 더 적다.

 특히 아베 총리의 합동 연설은 미국이 일본의 과거를 지우고 현재의 일본을 동맹의 전면에 내세운다고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과거사로 일본과 대치 중인 한국 외교엔 난제를 예고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연설할 경우 그 장소는 진주만 공습 다음날(1941년 12월 8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진주만 공습은) 치욕의 날”이라고 규정했던 자리다. 당일 미 의회는 대일 선전포고를 승인했다. 일본 총리가 한번도 이 자리에 합동 연설로 서지 못한 이유는 태평양전쟁의 원죄 때문이다. 외교 소식통은 “고이즈미 전 총리에 이어 2013년 2월 아베 총리의 방미 때도 일본 정부가 물밑에서 합동 연설을 추진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고 귀띔했다. 아베 총리가 이 자리에서 종전 70주년을 맞는 미·일 동맹을 역설하면 그 자체로 미·일 간 마지막 과제로 남았던 과거사에 대한 ‘종전 선언’이 된다.

 이는 한·일 관계에서 한국이 일본군 위안부 등에서 대승적인 자세로 나서라는 무언의 압박이 될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외교 전문가는 “미국은 이제 전쟁이라는 과거사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표시”라며 “과거사로 일본을 압박해온 우리로선 난감하게 됐다”고 우려했다.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도입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을 놓고 저울질 외교를 하는 사이 집단적 자위권 도입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 추진으로 대미 총력전을 펼친 일본에 밀렸다는 비판이 제기될 전망이다. 아베 총리의 연설이 가시화되며 일본이 돈과 인맥으로 미 의회와 행정부를 뚫는 사이 한국 외교는 ‘언론 발표용 외교’에 집중했다는 논란을 부르게 됐다.

워싱턴=채병건 특파원
서울=하선영 기자 mfemc@joongang.co.kr

아베 미 의회 연설에 공들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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