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盧대통령, 방황의 끝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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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노무현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 중 그 주위에 있었던 미국인들을 찾아보았다. 아널드 골드스타인. 링컨 기념관을 방문한 盧대통령을 안내했던 관리사무소 책임자다.

"대통령이 국민 통합을 들어 링컨을 매우 존경한다고 하더라. 호감이 갔다." 그에게 盧대통령이 링컨에 대한 책을 썼다고 말해줬다. 그랬더니 "책을 낼 정도냐"고 감탄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필 매케인. 그는 한국전 참전 기념비에서 盧대통령을 지켜봤다. 盧대통령이 기념비에 새겨진 참전의 정신을 기렸으면 한다는 게 그의 기대다.그 문구는 '자유는 거저 얻는 게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다.

그에게 "미국이 한국전 때 도와주지 않았으면 나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란 盧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했다. 그는 "정말이냐. 대통령이 미국에 비판적이고 북한에 우호적이라고 들었는데"라며 놀라워했다.

교민 간담회에 한국인 친구와 왔던 조셉 리드(이동통신 버라이즌 매니저). 그곳에서 盧대통령은 "미국은 큰 틀에서 자유와 정의가 항상 승리한 정말 좋은 나라"라고 격찬했다. 그의 반응은 '외국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盧대통령이 워싱턴을 떠난 다음날 미 평화연구소와 국방대학이 공동 주최한 세미나. 주제 발표자인 한국 전문가 랠프 코사(퍼시픽포럼 CSIS 회장). 그는 "회담 성공의 기준치를 낮춘 점도 있지만 정상회담은 성공했다. 우리는 盧대통령의 중대한 변화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에서 盧대통령은 새롭게 비춰지고 있다. 미국과 잘 지내기를 원한다는 그의 메시지는 호평을 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반미적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작심한 듯했다.

당선자 시절 그는 "한국이 미국을 거역한 적이 없다"고 선배 대통령들의 대미 자세를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친미적 언사는 역대 대통령들보다 훨씬 노골적이다.

미국을 향해 쏟아놓은 거친 말을 덮으려 하니 찬사의 수위는 높았다. 이제 盧대통령은 냉엄한 국제질서 속에 그 같은 폄하는 허망한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서울에 돌아와 그는 "국내정치나 국제적으로 지도력을 올바르게 행사하려면 미국과 관계를 잘 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북한이 하자는 대로 따라 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그런 접근자세는 국가 경영자로서 당연하다. 복잡미묘한 한반도 정세 속에 세계 최강의 동맹국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외교의 기본이다. 한.미 관계가 흔들리면 우리 경제는 힘들어진다. 경제가 엉망이면 정치 개혁의 추진력은 떨어진다.

자주만 내세우는 폐쇄적인 좌파의 열정만으론 북핵 위기를 풀 수 없다. 盧대통령은 동북아 중심론을 말한다. 중국.일본과 경쟁해 동북아의 중심에 서려면 미국의 협조 없인 불가능하다.

핵으로 협박하는 북한이 하자는 대로 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북한 정권에 핵을 포기하고 굶주리는 주민들의 생존과 인권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것이 그가 되새겼던 자유와 정의이고 통합의 정신이다.

한.미 관계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 盧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친밀해지고 신뢰를 쌓았다고 자평한다. 신뢰는 실천이 뒷받침돼야 한다. 미국은 실용주의의 나라다. 말로써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행동으로 확인한다. 미국은 盧대통령의 다음 단계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

박보균 논설위원 (워싱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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