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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글 김창욱기자 사진 양영훈기자)|제주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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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모흥혈(삼성혈)-. 먼 옛날 탐라개국설화의 삼신인이 땅에서 솟아나 왔다는 설화가 전해내려오는 이곳은 「제주」를 관향으로 하는 삼성, 즉 고·양·부씨문중의 발상지이자 성역.
삼신인중의 한사람인 부을나가 곧 부씨의 시조다.
고을나, 양을나와 함께 탐라의 하늘을 열고, 바다건너 벽랑국으로부터 오곡의 종자와 육축을 가지고 온 세처녀를 맞아 각각 배필로 삼고, 재주1도, 2도, 3도등 세지역에 정착하니 탐라는 융성했다한다. 이때부터 고·양·부 3집안은 약9백여년동안 탐라를 분할 통치해왔다는 것이다.
인간의 따스한 체취가 아직도 살아남은 탓일까. 짓궂은 날씨에 꽃시샘함박눈이 내려 대지를 하얗게 덮고있으나 3개의 혈주변에 내린 눈은 이내 스스로 녹아 없어진다.
매년 양력4월10일과 10월10일은 3문중이 모여 삼신인에게 제사를 드리는 대종일. 또 12월10일에는 제주지사가 초헌관이 되어 향사를 지내고있다.
탐라개국설화에 얽힌 유적지는 제주도 곳곳에 보존돼있다. 삼신인이 정착지를 찾기위해 활을 쏘았던 과녁인 「삼사석 (재주시미북동)」과 바다 건너온 벽랑공주를 맞이했던「혼인지(성산군온평리)」등이 태고의 전설을 들려준다.
탐라왕자였던 부단량은 삼국시대에 부씨문중의 맥을 이어온 대표적 인물. 그는 신라 무열왕때 접무사로 신라를 예방, 탐라와의 평화외교의 길을 트고 왕으로부터 작록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앞서 그는 사신으로 백제를 방문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는 백제와 신라를 오가며 등거리외교를 폈던 셈이다.

<시조는 부을나>
고려의 인물로는 부을내(문종원년·탐라국사신), 부정재(충렬왕·영사형서부사)등이 있다.
삼국시대나 고려때의 부씨상계는 실전되어 정확한 세계를 밝힐 수 없다.「이 때문에 부씨는 조선초의 부언경(진용교사·후령별장)을 1세로 삼아 부삼로(세종∼중종 통훈대부·4세)등으로 세계를 잇고있다.
부삼로는 유겸과 유성등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중 동생인 유성이 육지로 건너가 경기도연천지방에 부씨의 못자리를 잡는다.
그는 부씨역사상 최초로 육지에 뿌리를 내린 인물이다.
부씨인구는 전국 약6천명. 80%가 제주도에서 살고있으며 이들 모두 부유겸의 후손들이다.
탐라는 고려때부터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동부와 서부 두곳에 방호소를 두었는데 이를 「별방진」이라 했다. 부유겸은 세종초에 탐라동북부 방위사령관격인 어해장군이되어 별방진에 부임, 탐라를 지켰다. 그후 그의 아들 부세영등 9명이 어해장군에 오른다. 이렇듯 부씨는 전통적으로 탐라를 방어하는 무관의 가문으로 성장해 왔다한다.

<부세영아들 6파로>
부세영은 격, 협, 태, 진, 강, 홍등 6명의 아들을 낳아 무성한 숲을 이루었다. 이들형제가 「제주6파」의 파조들이다.
무장의 핏줄탓인지 부씨문중에는 가끔 기골이 장대한 장사가 나왔다고 한다.
부시웅(일면 부대어)은 그 대표적인물. 현용준씨가 쓴 『제주도의전설』을 보면 그에 관한 재미있는 얘기가 실려있다.
『심돌(남제주군성산읍시흥리)에 「부대각」이란 장사가 있었다. 그는 심돌동네 어귀에 살았는데 아침에 일어나 「어험」하고 기침을 하면 그소리가 얼마나 큰지 온동네 사람들의 잠을 깨웠다한다.
부대각은 육지로 장사를 자주 다녔다. 미역을 싣고가 팔아서 쌀을 사오는 것이다. 어느날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밤길에서 해적떼를 만났다. 해적들은 목숨이 아깝거든 그 쌀가마를 전부 자신들의 배로 옮기라고 호통쳤다. 뱃사공들은 새파랗게 질려 벌벌떨고….이때 부대각은 무서운 힘을 발휘, 쌀가마를 휙휙 공던지듯 해적의 배로 던졌다. 해적선이 낙엽처럼 출렁이며 금방 침몰할 것 같았다.
그제서야 해적들은 살려줄 것을 애원했다. 부대각은 도리어 해적선의 물건까지 빼앗아 싣고 돌아왔다.』
그는 조선중기 무과에 급제, 다경율만호를 지냈다 한다. 그와 쌍벽을 이루였던 또한사람의 역사로 부도일(부사직)이 있었다.
부종인은 조선조 부씨문중의 대표적인 인물. 정조 18년 문과에 급제, 대정현감·선략장군·사헌부장령·예조정랑등을 지냈다.
이밖에 조선의 인물로는 영조때 유명한 효자 부천겸, 청백리 부사민(대정현감)과 부용백(검지중구부사·오위장)등이 있다.
원래 제주도 원주민이었던 고씨 양씨가 대성으로 번성한데 비해 부씨가 희성의 위치에 놓이게된 것은 육지진출이 늦어진데다가 씨족들 대부분이 제주도를 고수했기 때문인듯.
이런 사정은 고씨 양씨가 뒤에 여러관향으로 분적한데 비해 부씨의 본관은 「제주」뿐이라는 사실에서도 엿볼수있다.
부희어는 조선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시조의 위패를 모신 삼성사가 헐리자 삼성사의 중건을 외치며 대원군의 정책에 항의하다 형장으로 숨진 인물이다.

<부성찬, 일제에항거>
부성찬은 일제의 암흑기에 삼성사를 지킨 사람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한 일제는 제주시의 요충지인 삼성사주변의 땅을 강제수탈하려 했으나 그는 이에 항거하며 끝까지 삼성사를 지키고 주변의 23만여평의 토지를 삼성사재단에 귀속시켰다.
부완혁(전조선일보주필 율산실업·건설대표이사) 부장현(전제주도교육감) 부장환(조선피혁사장) 부두집(서귀포시장) 부삼환(의학박사) 부상봉(일본동경암본공업사장) 부수안(서울대교수) 부영석(동경삼정(주)사장) 부강생(농박 서울대교수) 부청하(전 홀트아동복지회장)씨등은 해방후 사회각계에서 활약하는 얼굴들이다.

<지명인사> 빠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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