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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은의 편지

'꽃보다 먼저 나비 저기 오시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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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고 은 시인

평원(平園)에게

 어느 날은 그대와 나의 삶이 단 한 번이라도 세상의 동기가 되어주고 싶네. 또 어느 날은 세상의 가녘에서 그대와 나의 삶이 어디 있는지 모르게 쓸쓸해지고 싶네.

 이런 변덕으로 멀리 눈길을 보내네.

 고대사 속의 어느 날을 기념하는 것은 거의 종교행위이기 마련이네. 창세신화 개국신화와 결부된 국가의 기원도 역사이기보다 종교가 아닌가.

 하지만 근대사 혹은 당대사 속의 어느 날은 압도적으로 역사행위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네. 심지어 한 필부의 생애마저 당연히 역사의 요소가 아닐 수 없지.

 3·1절이 한반도 현대사 역사진행을 관통하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네. 이 3·1절의 하루를 나는 술 한잔도 없는 맨가슴으로 지냈네.

 그 누군들 이날이 1919년 3월 1일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바로 그날 이래의 100년 세월은 그날의 뜨거운 피가 식은 적 없었네. 묵은 명분이 새 실재를 낳아왔네.

 강도 외세에 맞선 비폭력항쟁과 그 항쟁에 겹친 국내외 무장활동이 더해져 왕조의 몰락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았던 것이네.

 또한 그런 자아의 의지로 근대국가 공화제를 여는 망명 임시정부를 세웠고 뒷날의 광복정부를 가능케 했네.

 이런 역사의 3월이 그 역사의식을 에워싼 자연의 3월인 것도 깨달아야겠네. 자연과 역사의 상반되는 개념이 하나의 가치로 총화(總和)를 이루는 것 얼마나 오묘한가. 아니 아무리 강조되는 역사도 그것이 자연의 그늘에서 가능한 것 아닌가.

 3·1운동이 다른 계절이 아닌, 그야말로 춘3월 첫걸음에 일어난 것도 그 숫자 주술과는 달리 그 운동이 청춘의 운동을 뜻하는지 모르네.

 처음에는 당시의 종교 지도층과 문화계 인사들에 의한 각성이었으나 그것을 삼천리 방방곡곡과 해외 각처로 드넓힌 것은 청소년층이었네.

 이 청춘의 개벽이 한반도 3·1운동에 이은 중국대륙의 5·4운동, 그리고 베트남 반외세운동과 맞닿지 않을 수 없게 되네.

 자연의 봄이 역사의 봄에 합치됨으로써 늙은 역사는 젊은 역사로 되고 이 새로운 역사는 새로운 계절의 의미를 반영하지 않는가.

 이런 사례는 1945년 8월 15일이 그 8월이라는 태양 작열의 고온으로 달구어진 역사의 한 절경(絶景)을 이루는 데서도 새삼스럽네.

 그러므로 3월은 역사로서의 피와 자연으로서의 꽃이 동행하는 한반도의 시간이네. 진작에 모진 뚝새풀은 언 땅 위에 시퍼렇게 돋아났고 나무들도 꽃눈 잎눈을 온몸으로 부풀리고 있네. 남도의 동백은 제 목을 뚝뚝 잘라 떨어뜨렸네. 요염한 홍매 정숙한 백매의 기쁨이 찬바람을 마다하지 않네.

 식물들의 일생은 매우 일원적이네. 떡잎에서 잎 그리고 꽃에서 열매라는 삶 말이네. 잎을 만드는 식(食) 세포가 꽃가루를 만드는 성 세포로 바뀌면서 수정란에서 어린 잎눈이 되고 이윽고 땅 밑 잔뿌리가 된다네. 괴테의 ‘식물 메타모르포제’가 이것이겠네.

 이제 이런 꽃의 시절이 화신북상(花信北上)이라는 이 강산의 축제가 한반도 어디도 제쳐두지 않고 두루두루 꽃대궐의 층층을 베풀어 줄 것이네.

 가을이면 거꾸로 이 강산의 찬란한 5색 단풍의 극치가 저 두만 압록으로부터 삼남 낙동 섬진 영산을 건너 한라산 탐라계곡을 다 덮어줄 것이네.

 과연 이런 가을 봄의 자연 절서(節序)가 이루는 색채 신명(神明)으로 한반도는 금수강산이 되지 않을 수 없네. 그런데 하늘이 내린 이 은전(恩典)은 자연의 차원으로만 그치지 않고 반드시 여기에서 일어나는 인간이나 민족의 역사현상에도 무관하지 않다네.

 최제우가 ‘때여 때여(時乎 時乎)’라고 읊조린 것은 그것이 결코 신비체험의 독백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 개시의 엄연한 징후를 체감한 선각(先覺)의 선포이겠네.

 마치 꽃소식에 앞서 그 꽃과 불가분의 나비나 벌이 사람보다 먼저 꽃을 불러내는 생태의 묘경(妙境)과도 맞닿아있겠네.

 최근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만인보론’으로 문학과 역사의 통섭을 시도한 박사학위자가 나왔네. 그 지도교수에게 원작자인 내가 붓글씨 한 폭을 써 보냈네. ‘꽃보다 먼저 나비 저기 오시네’가 그곳 연구 분위기에서 어떤 공감으로 받아들여질지를 굳이 걱정하지 않았네.

 꽃, 피기에 앞서서 그 꽃을 본능적으로 예감하는 그 나비의 지혜는 꼭 나비나 벌에게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놀라운 예감 또한 인간이 독점하는 감각활동의 특혜만이 아니겠네. 먼 인류의 조상시대나 그 이전의 원시생명시대 이래 어떤 시련도 다 견디어낸 근원물질의 생명체가 이어져와 오늘의 그대와 나 아니겠는가.

 저 고생대 1억 년을 이어온 ‘세포기억’의 영험(靈驗) 앞에서 나는 하잘것없는 1행의 시를 놓을 뿐이네.

 이런 우주 운행과 자연 순환의 무상 가운데서 인간의 역사가 오만할 수 없네. 역사가 반드시 자연으로부터 격리되지 않는 것. 자연은 반드시 역사의 어떤 부자연을 바로잡는 모성을 베푸는 것. 이 융합의 의미를 나는 우리들의 3월로 새기고 싶네.

 당연하다는 말과 자연스럽다는 말은 예로부터 하나였네. 한반도의 모순도 동아시아의 갈등도 세계 각처의 파국도 그것들의 해결 방식을 정치와 시장 이상의 어떤 자연논리에서 찾아야겠네. 어떤 창조적인 연대기도 시절인연의 작용일 터. 꽃 마중 가세.

고 은 시인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