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프로도 한류 예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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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중국에 출장을 갔을 때였다. TV 채널을 돌리다보니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을 리메이크한 중국판 ‘1박 2일’ ‘런닝맨’ ‘나는 가수다’ 등의 프로그램들이 방영되고 있었다. 이 중 한국 대표적인 주말 예능 프로그램인 ‘1박 2일’과 ‘런닝맨’을 모방한 프로그램은 중국 현지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한국 드라마와 대중가요에 이어 예능 프로그램까지, 그야말로 한류의 전성시대가 중국에 펼쳐지고 있었다. 도대체 한국 예능 프로그램의 어떤 점이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중국에서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된 것은 기껏해야 20년이 조금 넘는다. 1980년대에는 1년에 한 번 방영되는 ‘춘절연환회(春節聯歡會)’라는 설맞이 프로그램이 유일한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특히 89년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이 “신문·TV·라디오와 같은 대중매체는 공산당과 정부, 인민의 대변인”이라고 천명한 이후 중국의 방송은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받았다. 물론, 예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 2000년 밀레니엄 시대의 도래와 함께 중국에 빠르게 보급된 인터넷을 통해 중국의 젊은 세대는 외국의 예능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됐다. 초창기에는 언어적 장벽이 없는 대만의 ‘강희가 왔다’가 젊은 층에게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개방적인 주제를 거침없이 다루는 대만의 오락 프로그램은 당시 중국인들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TV를 통해 스타들의 진솔한 면을 볼 수 있고, 또 가벼운 정치적 풍자도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만 예능 프로그램이 종종 다루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들과 정치 풍자적 내용들은 중국처럼 사상통제가 비교적 엄격한 나라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저속한 내용들도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중년층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대만 오락 프로그램에 대한 중국 시청자들의 반응은 양극으로 나뉘었고, 즐겨보는 시청자도 젊은층에 국한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서구에서 수입된 오디션 프로그램과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참신한 포맷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잠시 받긴 했지만, 그 인기가 오래가진 못했다. 바로 이때 등장한 것이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이다.

예전에 한 친구가 중국 시청자들이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딱 두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고 했다. ‘힐링’과 ‘긍정의 에너지’다.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리메이크한 중국 프로그램 중 가장 먼저 성공한 작품은 ‘아빠, 어디가’다. 중국 매체들이 꼽은 최고의 힐링 프로그램으로 한 주간의 분주함을 잠시 내려놓고 가족이 주는 행복과 힐링을 만끽하게 해준다.

스타 아빠와 귀여운 자녀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천진난만한 세계와 자녀를 향한 아빠의 무한한 애정, 가정의 따뜻함이 보는 시청자들의 마음 또한 푸근하게 만든다. 게다가 다양한 야외 촬영지도 볼거리 중 하나다. ‘아빠, 어디가’는 주말의 따뜻한 햇살 같은 프로그램이다. 중국에서 한국 예능 프로그램의 인기몰이는 나처럼 한국에서 살고 있는 중국인들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얼마 전 중국 예능프로그램 프로듀서인 지인이 내게 이런 지적을 했다. “한국의 경우 미국이나 유럽같이 체계적인 포맷이나 상세한 제작 매뉴얼이 없고 지나치게 스타나 제작진의 개인적 역량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프로그램을 더욱 다양하고 유연하게 만드는 장점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발전 가능성을 제약할 수도 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본 그의 평가를 새겨볼 만한 것 같다. 한국 예능 프로그램이 좀 더 브랜드 가치를 높여 전세계로 진출하길 소망해 본다. 천리 중국 선양(瀋陽)에서 태어나 선양사범대학을 졸업했다. 중국 고객 마케팅 및 서비스를 연구하고 있으며 중국 관련 자문과 강의를 하고 있다.

천리(陳莉) 국립외교원 전임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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