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쇄」허성윤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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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인쇄인 허성윤씨(37·동방연극인쇄공사)는 장안의 연극인쇄물은 그가 모두 만들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극인이 아니면서 10년동안 연극에 관한 인쇄를 맡아왔습니다. 낮은 이윤 때문에 어느인쇄업자도 선뜻 맡으려하지 않는 연극인쇄물을 저는 뚜렷한 자부심을 갖고 일해왔습니다.연극사에 남는 연극인쇄물을 만든다는 것은 인쇄업자인 제가 연극문화에 참여하는 유일한 통로인 셈입니다.』
그 때문에 연극계에서는 누구도 그를 인쇄업자라 부르지 않는다. 연극 인쇄물을 한자 한자 뜯어 고치고 공연시간 전에는 틀림없이 인쇄물을 배달하는 그의 작업신념을 보면 인쇄인으로서가 아니라 연극문화에 보탬이 되어보겠다는 그의 의지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공연 몇시간전에 원고를 갖다주어도 어떻게 해서든지 공연시간에 연극팸플릿을 도착시켜주는 그의 정성때문에 연극계에서 「무서운 인쇄인」으로 통한다.
『연극계는 제가 뿌리를 내린 터전입니다. 10년전 처음 연극물인쇄업에 손댈 때만해도 극단의 인쇄물을 모두 나혼자 만들었습니다. 인쇄업자지만 연극문화에 참여한다는 자부심도 강렬했습니다. 간판을 동방연극인쇄공사라 붙인것도 다 이때문이죠. 제가 만든 연극포스터가 거리에 붙어있는 걸 보면 그래도 연극물인쇄에 매달린 제작업이 소중하기만합니다.
연극물인쇄업이라면 각 극단이 의뢰해 오는 연극팸플릿·티킷·대본·포스터·공연연보나 연극인수첩·연극지등 연극과 관련된 인쇄물 모두를 일컫는다.
오자없는 고도의 정확성과 귀신처럼 들어맞는 약속시간의 엄수는 인쇄업자의 생명. 연극물 인쇄는 이밖에도 인쇄원고가 공연 3, 4일전에야 도착하는 특성때문에 밤샘작업이 대부분.
그래도 그는 지난72년 단돈15만원으로 인쇄소를 차릴 때만해도 연극은 「감히 넘보지 못하는 신비의 영역」이었다고 회고한다.
『원로연극인 김경옥선생님의 친지분 소개로 자유극장의 팸플릿을 처음 만들어본 것이 연극과 저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연극인 들만큼 열심히 일하고 때묻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제가 연극인으로부터 받은 첫 인상이지요. 지금은 극단도 많아지고 연극인수도 엄청나게 늘어나 신비스런 맛이 많이 퇴색한 것 같습니다.』
『예술극잠이 명동에 자리잡을 때만해도 명동은 연극인과 관객들의 열기로 넘쳐흐른 황금기였다』는 그는 78, 79년이 연극계에선 최고의 시대였다고말한다.
어쨌든 연극계에서 10여년을 지낸 그는 본의아니게 연극계의 산증인이 되었고, 연극인 차범석씨를 결혼식 주례로 모시기도 했다.
연극물 인쇄업에 매달리면서 그가 내세운 신조는 「연극인과 친해야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안되는 일도 될 수 있게하는 뚝심도 바로 연극계에서 배운 생활철학이다.
『과거에 연극포스터는 상당히 정직했어요. 대사 한마디, 문구 한자에도 열성을 다했지요.
그에 비하면 요즈음은 작품내용과는 동떨어진 문구를 호기심만을 위해 집어넣는 등 다소 과장된 느낌이 듭니다. 근래엔 인쇄대금이 자주 밀리는 걸 보아 연극계 자금사정이 더욱 빠듯해짐을 알수 있읍니다.』1년에 그가 해내는 연극인쇄물은 약90편정도. 초창기 전극단의 인쇄물을 휩쓸던 시절에 비하면 연극인쇄물량은 3분의 1로 줄어든 셈.
『직원이 늘어서 연극물 인쇄만으로는 경영을 할 수 없어 요즈음은 다른업종 인쇄물을 받고있읍니다. 그러나 연극계의 일을 선두에 둔다는 신조는 변함이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연극인들과의 작업은 새로운 삶의 활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연극팸플릿을 작품처럼 만든다. 영화는 한번보고 잊어버리지만 연극은 괩플릿이라도남겨 자료로써 증인을 삼자는 그의 의지로 제작된다.
연극계에서 터전을 닦은 터라 그는 앞으로 연극물인쇄를 더욱 미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연극 팸플릿의 컬러화와 아울러 디자인의 작품화다. <육상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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