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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확한 지수는 고장난 체온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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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몸에 열이나고 탈진상태에 있는데 체온이나 몸무게가 정상으로 나온다면 큰일이다. 체온계와 저울이 고장나거나 잘못보면 그럴수 있다. 막상 당사자는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수치상으로 이상이 없다는데야 어쩌겠는가. 당장의 고통은 말할것도 없고 손쓰는 것이 늦어져 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
요즘은 무엇이든지 오랜경험이나 상식·감같은것 보다 숫자로 나타낸 기록이 훨씬 존중된다. 그것이 훨씬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실제 열이나고 머리가 아프다고호소해도『지수상 정상이니 당신은 안아픈것』이라 해도 놀라지 않게됐다. 지수란것은 평균개념이 많다.
『당신은 열이 난다고하나 이방에 있는 사람들의 평균을 내보면 정상이니 걱정할 필요없다』 는 식이다.
지난9월 영동사건이 터져 금융이 휘청할때도 수치상으로는 어음부도율이 8월의0·10%에서 0·12%로가볍게 움직였을 뿐이다.
도도한 강물의 흐름도 한군데서 보면 무척 평온하다. 그걸보고 안도하는것이다. 하기야 잘안된다고 하기보다 잘된다고 하는것이 하기도 쉽고 듣기도 좋긴하다. 경제지지란 복잡미묘한 경제의 움직임을 수치로 나타낸것이므로 아무래도 미흡하게 마련이다.
물가지수가 물가의 오르내림을 보여준다해도 그것에서 우리네 살림살이의 때묻은 무게를 실감할수 없으며 부도율로 자금사정을 짐작할수는 있으나 이상심리에 들뜬 돈의 난기류를 어떻게 알것인가. 러니까 오동잎떨어지는걸 보고 가을이 오는걸 아는 감과 경륜을 높이 치는것이다.
물가지수가 특히 그렇다. 금년들어 물가가 크게 안정된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1월말까지 소비자물가는 1·7%올랐고 도매물가는 1·0%가 내렸다. 그런데 왜 물가에 대해 의구심을 못버리는것일까.
장기저축으로 은행에 돈을 턱 맡기기 보다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려하고 집값은 왜오르는것일까. 정기예금도 3개월이하짜리가 44·6%나 된다. 지수상으로 보면 실질금리가 충분히 보장되어 서로 은행에 예금을 하겠다고 밀려들고 돈을 빌리는사람은 뜸해져야 옳다. 실질금리가 너무비싸 빌어간 사람은 은행돈을 다투어 갚아야 이치에 맞는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실질금리를 재는 자(척)에허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내집을 갖는데 남다른 애착을 갖고 집값에 매우 민감하다.
저축은 으례 집마련으로 귀결된다. 부동산값이 안정되어 자기집을 갖거나 세들어 살거나 별상관이 없는 외국과는 다르다.
그런데 우리도매물가지수엔 집값이 반영안되어 있다. 소비자물가지수에 집세값만 조금 잡힐뿐이다. 또 일반가정에서 가장 부담을느끼는 학비나 의료비도 도매물가엔 안잡힌다. 소비자 물가에 잡힌다해도 지극히 공식적인 것이다. 따라서 집값등이 폭등해도 물가지수는 계속 평온하다.
지난3월 부동산투기소동이 났을때도 도매물가는 0·3%가 오히려 떨어지고 소비자물가만 0·4% 오른것으로 나타났다.
경제기획원은 권위있는 월례경제동향브리핑에서『물가는 3월현재 도보가 전년말에 비해 0·1% 감소를 보인반면 소비자는 1·8%의 증가를 보여 소비자물가가 다소 진정세를 보이고있다』고 엄숙히 보고했다. 열이 펄펄 나는데 수치상으로는 평온하다고 진단한것이다. 당연히 정책대응도 늦고 평온할수 밖에 없다.
요즘 많이 쓰는 실질금리라는 말은 명목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뺀것을 말하는데 실질금리는 물가안정으로 자꾸 높아지고있다. 김만제재무장관이 밝힌바에 의하면 실질금리는 작년의3·2%에서 금년엔 무려5·2%로 높아졌다. 최근 몇년사이에 가장 높은 기록이다.
은행금리가 낮은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가장 높다는것이다. 계산대로라면 은행돈을 빌은 사람은 높은 이자때문에 큰 고통을 당하고 예금한 사람은 희희낙낙해야 옳다. 그러나 은행빚이라도 내서 ,집산사람과 은행예금을 한 사람의 재산격차는 너무 벌어졌다.
한국에서 장기저축의 귀착점이 되는 집값을 뺀 물가를 기준으로 보질금리운운하니「높은 실질금리」가 생경하게 들리는 것이다. 열을 내면서 체온계를 엉뚱한데 갖다댄것과 같다. 금년들어 10월말까지 아파트값(주공조사)은 이미17%가 올라 은행빚 얻어 집산사람의 실질금리는 마이너스 7%다. 가만히 앉아서 이득을 본것이다.
현재의 실질금리계산방법은 은행에 돈맡긴 사람엔 불리하게, 돈쓴사람엔 유리하게 나타난다. 그걸 근거로 정책을 펴니 예금자는 손해보고 대출자는 이익을 보는것이다. 그런데도 정반대인것처럼 치부되니 기가 찰노룻이다. 차라리『예금이자를 많이 못줘 미안하지만 물가안정을 위한것이니 길게보고 양해하라』고 한다면 마음이나마 흐뭇하겠지만 자꾸 이득이라고 우기는데야 할말이 없어진다.
이렇듯 경제의 체온계나 저울이 잘못되면 엉뚱한 소리가 나오고 서로가 게면쩍어진다. 실질금리가 이토록 높은데 장기예금을 안하는것은 경제를 잘 모르기때문이라고 다른 한쪽에서 설득하려들면 다른 한쪽에선 이론적으론 어떨지몰라도 당장 손해보는짓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볼멘소리로 응수한다.
더 낭패스러운것은 빗나간 처방이 나오는것이다. 조용히 섭생·경양해야할 몸인데 수치상으로 굉장히 건강한것 처럼 나타나 무리를 하게된다. 하루 이틀 몸조리하면 나을것을 수술까지 해야할 사태로 번질수도 있다.
지금 무엇보다도 시급한것은 경제를 재는 체온계나 저울을 고치고 그것을 바로 읽는것이다.
최만석<편집부국장겸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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