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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기운에 들썩이는 난(蘭) 시장 - 취미 넘어 자산관리 수단으로 각광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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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한국춘란 올해 첫 경매서 사상 최대 낙찰가 기록 ... ‘김영란법’ 악재에 농가는 울상

사진:오상민 기자

서울 양재동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화훼공판장에서 1월 14일 열린 올해 첫 한국춘란 경매에서 단원소(원판 소심)가 1억500만원에 낙찰됐다. 그동안 최고 경매가는 8900만원으로, 새해 첫 경매부터 최고 낙찰가를 기록하자 난(蘭) 애호가는 물론 초보자들의 관심도 뜨거웠다.

aT 화훼공판장은 지난해 춘란시장 거래 활성화와 화훼산업의 발전을 위해 아시아 최초로 춘란 도매시장 경매제를 도입한 뒤 6월부터 매월 2회씩 경매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춘란 경매실적은 20억원에 달한다. 송기복 aT 화훼공판장장은 “한국 춘란의 경매정착을 위해 신규 중도매인을 추가 유치하고, 입문자를 위한 교육 강좌도 확대할 계획”이라며 “최고가 낙찰을 계기로 침체된 국내 화훼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난은 온도와 기후대에 따라 크게 온대성 난과 열대성 난으로 나뉜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일본에서 자라는 온대성 난을 가리켜 동양란, 필리핀·말레이시아 등에 분포하는 열대성 난을 서양란으로 분류한다. 일반적으로 동양란은 산림지대 부엽토에서 자란 지생란이다. 서양란은 나무줄기나 바위에 붙어자라는 착생란이 많다. 서양란은 화려하고 큰 꽃이 특징으로, 비교적 재배가 쉬워 다양한 품종개량을 통한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반면 깊숙한 산속에서 자생하는 동양란은 환경에 따라 꽃과 잎의 색상이나 모양이 천차만별이다. 같은 종류라도 꽃이 피어 있는 기간이나 모양에 따라 값어치도 달라진다. 희소성이 있을수록 값이 올라간다. 그중에서도 봄에 피어 춘란으로 불리는 우리나라 동양란은 고매한 선비정신을 대변하며 난 애호가들의 인기를 끈다. aT 화훼공판장에서 동양란을 취급하는 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 동양란이 일본·중국에 비해 품종이 우수해 최근에는 공판장을 직접 찾아 난을 사가는 외국인 관광객도 늘었다”고 말했다.

업계가 추산하는 국내 춘란시장 거래규모는 약 2500억원. 그동안 난은 일부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비제도권 야시장에서 거래돼 말그대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또한 식견이 있는 일부 전문가들을 제외하곤 일반인들은 난의 가치를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해 춘란 경매가 도입되기 전에는 중국 등 외국산 난을 한국산으로 속여 고가에 판매하는 등 각종 부작용이 잇따랐다. 4년째 난을 판매하고 있는 양성호(가명·54)씨는 “채취· 재배 방식의 특성상 가정에서 소규모로 길러 판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알음알음 정보를 얻고, 좋은 품종이 있다고 하면 개인적으로 찾아가 값을 치르는 일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난시장은 유통구조가 불투명하고, 정확한 감정가조차 매기기가 어려웠다.

희귀종인 경우에는 촉당 가격이 수백만~수억원에 이르다 보니 대기업 임원, 고위관직자들이나 즐기는 ‘고상한 취미’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이번 춘란 경매 도입을 계기로 취미를 넘어 재테크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늘었다. 실제로 2월 경매에 참가한 150여명 중 상당수가 재테크에 관심있는 일반인 이라는게 aT 측의 분석이다. 경매 현장을 찾은 고경수(가명·67)씨는 “은퇴 후 집안에서 화분을 키우는 재미에 빠졌는데, 난을 기르는 지인이 추천해 함께 왔다”며 “잘만 재배하면 취미를 살리면서도 돈이 된다고 하니 도전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은퇴자·주부 사이에서 각광

지난해 6월 서울 양재동 aT 화훼공판장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춘란 경매가 열렸다.

이른바 난(蘭)테크로 불리는 재테크 방식은 2000년대 중반 처음 등장했다. 난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1석2조의 재테크 방식으로 관심을 끌었다. 업계가 추산하는 국내 난 애호가들은 100만명 남짓. 그중에서 20만~30만명은 난을 거래하거나 투자 목적으로 기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난테크가 특별한 이유는 자연번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촉에 100만원인 품종을 재배해 1년 후 한촉이 더 자라나면 가치가 2배가 되는 것이다. 좋은 품종을 잘 선택하면 투자 원금은 물론이고 새싹이 돋아나는 만큼 추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게 난테크의 매력이다.

재배법 역시 까다롭지 않아 별도의 시설 없이 가정에서 재배가 가능하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200분 넘는 난을 키울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렇다 보니 평소 취미로 난을 키우는 은퇴자나 주부들의 재테크 방식으로 인기가 높다. 초보자의 경우 처음부터 무리해서 희귀품을 고집하기보다는 100만원 내외의 대중적인 품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직접 배양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소유하고 있는 난을 난원이나 유통업체 전문가에 일정한 관리비를 지불하고 재배를 맡기는 경우도 있다.

고가의 품종에 투자하기가 부담스러운 경우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구매해 전문 위탁을 맡기기도 한다. 이때 재배자는 총 수익금의 10~20%를 가져가고, 난이 죽거나 수익이 나지 않을 경우에는 투자 원금에 은행 이자를 덧붙여 보상하는 게 일반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처음에 300만원에 구입한 난을 키워 3년 만에 1000만원에 되판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난테크에 뛰어들었다”며 “잘만 하면 원금을 보장받으면서도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같은 저금리 시대에 연평균 수익률이 20% 가까이 나는 투자처가 또 어디 있겠느냐”고 덧붙였다. 그러나 난테크가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다. 야생에서 자란 난을 인위적으로 재배하는데는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짧게는 1~2년, 길게는 4~5년의 재배 기간을 거쳐야 상품화가 가능하다. 재배에 걸리는 시간이 길다 보니 당장 투자금액을 회수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난시장에도 트렌드가 있어 현재는 희소가치가 높아 인기가 많은 품종이라 하더라도 몇년 후 흔해져 값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난을 취미로 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적인 품종은 사고 파는데는 어려움이 없지만 경기에 영향을 많이 받아 값이 떨어질 위험도 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2008년께 촉당 1000만원을 호가하던 난이 지금은 600만원 선에 거래되고 있다”며 “어떤 난이 값이 오른다 싶으면 너도나도 그 품종을 사서 기르니 몇년 후에는 가격이 내려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는 일단 10만~20만원에 구매할 수 있는 취미용 난을 시작으로 재배법을 충분히 익힌 다음 투자 가치를 판단하라고 조언한다.

고가의 동양란이 저금리 시대에 고수익을 올리는 재테크로 주목받으며 훈풍이 부는 것과는 반대로 서양란은 역풍을 맞았다. 서양란은 꽃이 핀 상태로 수 개월 간 유지가 가능하고, 공기 정화 작용을 해 일반 가정에서 화분으로 키우거나 선물용으로 흔히 쓰는 난이다. 호접란, 신비디움, 팔레놉시스 등 그 종류만 100여종이 넘는다. 1990년대 초반 재배 기술이 발달하고, 정부 지원책이 이어지며 국내 화훼산업을 이끌었다.

서양란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

그중 심비디움은 국내뿐 아니라 중국에서 큰 인기를 얻어 수출 효자상품으로 각광받기도 했다. 특히 중국 설날인 춘절이면 수출량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주문이 밀려들어 농가들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실제로 2000년대 중반까지 서양란 농가가 호황을 누렸고, 도시농업에 적합한 작물로 인식돼 퇴직금으로 사업을 시작한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서양란의 호황기는 거기까지였다. 이후 중국·대만 등지에서 국산 품종을 카피해 대량으로 생산하면서 수출 물량이 뚝 끊겼다.

너도나도 서양란 재배에 뛰어든 바람에 국내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다. 지난해엔 계속된 경기침체에 세월호 참사 등 악재가 겹치며 난시장 역시 위기를 맞았다. 2000년대 초반 200여 곳에 달했던 호접란 농가는 현재 90여 곳으로 절반 이상 줄었다. 박승동 aT 화훼공판장 경매실장은 “국가에서 장려하던 때 난 재배에 뛰어든 농가 대부분이 로열티·자재비·인건비 등 생산비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폐업 신청을 했다”며 “어려움에 처한 농가 중 상당수는 난 재배를 포기하고, 딸기·토마토 등 먹거리 농산물로 방향을 틀었다”고 말했다. 그는 “고가 난 품종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전체 시장이 커져야 국산 품종의 경쟁력도 높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설상가상 공무원의 부정청탁과 금품수수 등을 금지하기 위해 마련된 ‘김영란법’이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어 시름은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이 법은 공직자가 3만원 이상의 선물을 받는 것을 금하고 있다. 보통 5만~10만원에 거래되는 난초 역시 대상에 포함된다. 난시장이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경기 화성시에서 30년째 호접란을 재배하고 있는 박정근 세제난원 대표는 “가장 대중적인 품종이 5만원선인데 화분·포장값과 유통 마진 등을 제하고 나면 정부의 3만원 미만 제한을 지키기란 불가능하다”며 “난을 비롯한 화훼산업은 고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미래산업인데 정부의 지원을 받긴 커녕 청탁품 혹은 사치품으로 인식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경기 화성시의 호접란 농가. 봄을 맞아 출하를 앞둔 난꽃이 만개했다.

흔히 난 재배를 두고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한다. 개인은 물론 농가에서 대량으로 배양해 상품화하는데는 최소 2년이 소요된다. 매일같이 물을 주고, 더운 날은 시원하게, 추운 날은 따뜻하게 애지중지하며 키워야 비로소 상품으로서 가치를 갖는다. 고급 품종의 난 화분이 사상 최고 경매가를 기록한 그 날, 화훼공판장을 찾은 또 다른 농민이 2년간 보살핀 난을 팔고 낙찰받은 금액은 한분 당 단돈 2500원이었다.

글=허정연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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