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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 미필 골퍼의 국적변경을 탓하기 곤란한 까닭

중앙일보

입력

유러피언투어 대회 요보그 오픈 중계를 보다 깜짝 놀랐다. 리더보드 상위권에 오른 김시환(27) 옆에 미국 성조기가 펄럭였기 때문이다. 방송사 실수인가 하고 알아봤더니 지난해말 미국 시민권을 땄다고 한다. 김시환은 서울에서 태어나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타이거 우즈와 데이비드 듀발 등이 우승했던 US 주니어 아마추어 챔피언십 2004년 우승자다. 타이거처럼 스탠퍼드 대학에 갔다. 미셸 위와 입학 동기다. 대학팀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했다. 프로 전향 후 약간 슬럼프 기미를 보이며 유럽 챌린지 투어(2부 투어)로 물러섰지만 장타에 재능도 뛰어나 조만간 정상권으로 돌아올 엘리트 선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시환의 미국 시민권 취득은 한국 남자 엘리트 골퍼의 엑소더스 신호인지 모른다. 여론 때문에 국적 변경을 주저하는 선수가 있는데, 선례가 생겼으니 외국인이 되는 선수가 더 나올 것이다. 현재 해외에서 활약하는 병역 미필 선수는 탁구스타 안재형-자오즈민 부부의 아들 안병훈(24)과 노승열(24), 정연진(25), 김시우(20) 등이다. 물론 배상문(29)도 그 중 하나다.

안재형씨는 “영주권만으로도 충분해 시민권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해외에서 체류하는 엘리트 골프 선수들 사이에 미리 미리 준비하자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래 외국에 체류하고 있으면 징집제도에 대해 거부감이 크고, 병역의무에서 빠져나갈 구멍도 커보인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활동시기가 짧고 수입은 많은 운동선수라면 군대에 안 가는 방법을 고려해 볼 것이다. 전부 그렇지는 않더라도 상당히 높은 비율의 사람들이 군대 안 갈 방법을 찾아봤을 거다.

박찬호나 박지성, 추신수 등은 대표팀 성적으로 군대에 안 갔는데 만약 면제 받지 못했으면 어땠을까. 한국으로 돌아와 병역의무를 이행했을까. 야구 백차승이 미국 시민권을 딴 것처럼, 축구 박주영이 모나코 영주권을 취득한 것처럼 다른 방법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민가는 사람들에게 한국인들은 쿨하다. 개인 선택의 문제라고 보는 듯하다. 여자 골퍼 리디아 고가 뉴질랜드 국적으로 활동하는데도 한국인은 별 반감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국 시민권을 딴 김시환이나 타국 국적 취득을 고려하고 있는 남자 선수들을 비난하기도 어렵다.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이지만 그렇다고 여자 선수는 외국국적을 따도 되고 남자 선수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미국 국적의 케빈 나(32)나 뉴질랜드 국적의 대니 리(25)처럼 일찌감치 해외 국적을 따는 것는 괜찮고, 가능하면 한국 국적을 지키려다 20대 중반 뒤늦게 ‘전향’한 선수를 비난하기도 이상하다. 어디까지 되고 어디서부터 안 되는지의 경계는 매우 불분명하다. 불투명한 안개속같다. 병역문제는 너무 민감해서 지뢰밭이기도 하다. 이처럼 매우 위험한 곳에서 한국남자 골퍼들은 고뇌하고 있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병무청의 해외 여행 허가 없이 미국에서 프로골퍼로 활동하고 있는 배상문을 옹호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러 사정에도 불구하고 배상문이 병역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본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 투어에서 성장한 배상문이라면 한국인의 짐도 져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그래도 배상문이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하면 돌을 던질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가수 유승준처럼 출입국 관리법에 따라 입국거부가 되더라도 자신의 길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되면 갈 수 있다. 그건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인력유출은 문제다. 한국 남자 골퍼들은 실력이 좋을수록 다른 나라 국적을 딸 가능성이 크다. 고급 자원의 엑소더스가 생기면 골프의 심한 여고남저가 더욱 악화될 것이다. 병역문제에 뾰족한 해결책은 없다. 아마추어만 출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시대착오적인 아시안게임 골프에 프로 참가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것일 게다.

성호준 기자 kar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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