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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view &] 저물가 장기화가 가져올 악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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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권선주
기업은행장

전 세계적으로 저물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유로존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0.4%에 그쳤으며, 올해에는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리스와 스페인을 비롯한 여러 유로존 국가들은 이미 디플레이션 국면에 진입해 있다. 중국도 올해 1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8%까지 하락하면서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고, 일본은 장기 디플레이션 국면에서 탈피하고자 무기한 양적완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한국 역시 저물가가 지속되고 있고, 일부에선 디플레이션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한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13년과 2014년, 2년 연속으로 1.3%를 기록했다. 전국적으로 소비자물가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1965년 이후, 연간 물가 상승률이 2%를 하회한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인 99년(0.8%)을 제외하고는 2013년과 2014년, 단 두 해 뿐 이었다.

 월간 물가 수준 역시 하락세를 지속하고 있으며,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 소비자물가는 2개월 연속으로 전년 동월 대비 0.8% 상승하는데 그쳤다. 특히 올해 1월 소비자물가 상승률 0.8%는 담뱃값 인상으로 인한 효과가 크게 반영된 결과이며, 이 효과를 제외할 경우에는 0.2%에 불과하다. 이는 65년 이후 월간 최저 수준이다.

 물론 최근의 물가 상승률이 하락한 주요 원인은 국제 유가 하락이며, 향후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국제 유가 하락의 근본 원인이 전 세계적 수요 부진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역시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다. 또한 디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물가가 장기화되는 현상 역시 우리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럼 저물가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 왜 문제일까. 한국은 그동안 고물가로 고통을 받은 적은 있어도 저물가를 걱정한 적은 거의 없었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물가가 거의 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걱정할 일이 아니라 환영할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저물가의 원인이 수요 부진 때문이라는 것과 저물가가 단기간이 아닌 장기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향후 장기간 물가가 거의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불요불급한 소비는 최대한 뒤로 미루려고 할 것이다. 이는 소비를 더욱 위축시킬 것이고 기업의 생산 부진도 더 심화되고 수익성도 악화될 것이다. 기업 입장에선 소비가 위축될 것으로 예상되면 투자를 늘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기업의 실적 악화와 투자 감소는 고용 부진을 초래하고 가계는 고용 불안으로 소비를 더욱 줄이려할 것이다. 또한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수요가 부진한 상황이어서 수출 개선을 기대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소비와 기업 실적이 부진하면 정부의 세수가 감소하고, 이는 정부지출 감소로 연결될 수 있다. 즉, 저물가가 지속되면 경기가 더욱 둔화되는 악순환 과정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저물가가 장기화될 경우 이를 탈피할 정책이 마땅치 않다는 점도 문제이다. 기준금리 인하와 같은 통화완화 정책을 시행해도 소비와 투자가 늘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미 한국 경제가 유동성 함정에 들어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가계의 가처분소득 중 실제 소비 지출 비중을 나타내는 평균소비성향이 계속 하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지난해 4분기에는 관련 통계가 작성된 2003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와 같이 수요 부진에 의해 저물가가 장기간 지속될 경우에는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성장 잠재력이 떨어지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처음 경험하는 장기 저물가에 대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가계와 기업은 과거의 관행에서 탈피해서 새로운 경제상황에 맞게 지출과 투자, 부채를 포함한 자산관리 등 경제활동과 관련된 전반적 측면에서 합리적인 기준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단기간에 경기를 활성화하는 것보다는 장기적인 시각에서 우리 경제의 구조를 개선해 나가는데 중점을 둬야 한다. 구조를 개선해 가는 과정이 힘들겠지만 이에 성공하면 우리 경제는 한 단계 성숙해질 것이다.

권선주 기업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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