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원·신건씨 영장 "장기간 걸쳐 조직적 불법 도청"

중앙일보

입력 2005.11.15 05:50

업데이트 2006.05.15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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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검찰이 14일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함으로써 불법 도청을 뿌리 뽑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전직 국정원장들이 동시에 사법처리되기는 사상 처음이다.

서울중앙지검 황교안 2차장검사는 이날 "이번 불법 도청 사건은 국정원장을 정점으로, 8국 직원들이 조직적.체계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국민을 상대로 저지른 대규모 불법행위"라고 규정했다. 또 "국정원은 본래 임무인 수사나 국가안보와 상관없는 국내 인사들에 대한 휴대전화 불법 감청을 했다"며 "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고 영장 청구의 배경을 설명했다.

검찰은 지난달 26일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을 구속기소하면서 공소장에 임.신 전 원장을 공모범으로 명시해 이들을 사법처리할 것임을 암시했다. 두 사람이 불법 도청에 관여한 혐의를 끝까지 부인하자 사전 구속영장이라는 마지막 수단을 선택했다.

이에 대해 임씨는 이날 "부하직원들이 알아서 했다"고 혐의사실을 부인했다. 신씨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 "새로운 중대한 범죄"=임.신씨가 관여한 불법 도청은 국가정보기관이 장기간에 걸쳐 자행한 조직적.계획적 범행이라고 검찰은 못 박았다. 국정원이 해명하듯 끼워넣기 수준의 도청이 아니며 과거의 유선전화 도청과도 차원이 다르다는 뜻이다.

검찰은 당초 이 사건이 국정원의 과거 고백으로 시작된 측면이 있고 두 명을 모두 구속할 경우 국정원에 부담을 준다는 점 때문에 고심을 거듭했다. 국정원의 위상.임무수행 등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받지 않는 김영삼(YS) 정부 시절 안기부장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검찰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임.신씨가 과거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라는 검찰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부인으로 일관하자 엄중 처벌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구속영장 청구 이유로 검찰은 ▶국내 주요 인사들의 휴대전화를 무차별적으로 24시간 도청했고▶대통령의 근절 지시에도 불구하고 많은 예산을 투입해 도청 장비를 개발했으며▶전화국 유선중계통신망을 통째로 끌어와 불특정 다수의 국민을 잠재적 피해자로 삼은 점 등을 지적했다. 국정원이 그동안 대외적으로 휴대전화 감청 사실을 부인하면서도 내부적으로 불법 도청을 계속해 왔다는 점도 고려됐다.

◆ "도청 최고 책임자는 국정원장"=검찰은 "국정원 조직의 특성상 모든 권한이 집중된 국정원장이 대부분의 사안을 직접 총괄하도록 돼 있어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임씨의 경우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R-2)가 막 개발된 시점에 도청 대상자의 전화번호를 대량으로 입력해 본격 사용했고, 주요 현안에 대한 첩보 수집을 지시하는 등 적극 관여한 사례가 확인됐다. 또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CAS)를 개발해 본격 사용한 점을 중시했다.

검찰 관계자는 "임씨가 대북 문제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불구속 기소될 것이라는 일부 관측이 있었으나 수사 결과 국내 정치문제에도 상당히 관여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신씨 역시 R-2를 계속 사용하면서 불법 도청이 체계적으로 이뤄지도록 했다. 수사가 시작된 뒤 국정원 간부들과 수차례 만나거나 전화 통화를 하면서 증거 인멸과 회유를 시도했다고 검찰은 지적했다.

신씨의 도청장비 폐기 지시에 대해서도 "감청장비의 국회 보고 의무가 새로 포함된 개정 통신비밀보호법이 시행(2002년 3월)되기 이틀 전에야 폐기를 지시해 자발적 폐기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뜻밖의 장애가 생겨 범행이 미수에 그친 경우'(장애미수.障碍未遂)에 해당돼 감경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신씨는 "불법 도청 사실을 알게 돼 감청장비를 폐기하도록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수사는 마무리 국면=검찰은 국정원장 윗선, 즉 DJ 정부 핵심 인사들의 불법 도청 관여 가능성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검찰 관계자는 "국민의 정부 들어 도청 피해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이 도청의 최대 피해자이므로 불법 도청을 하지 말라고 수차례 지시했음에도 (국정원장들이) 지시를 어겼다"고 말했다.

앞으로 검찰은 국정원 도청 문건의 외부 유출 경위를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2002년 9~11월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과 김영일 전 의원 등이 "국정원 도청 문건"이라며 공개한 유력 정치인, 경제계 인사 등의 전화 통화 문건들이 어떤 경로로 외부에 유출됐는지 조사할 방침이다.

장혜수 기자

임동원씨 남북 정상회담, 6·15 선언 이끌어
신 건씨 법조계 호남 간판 … DJ정권서 중용

임동원(左).신건 전 국정원장은 김대중 정부의 핵심 실세들이었다.

평북 출신으로 육사 13기인 임씨는 1980년 소장으로 예편한 뒤 나이지리아.호주 대사, 외교안보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DJ 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임명된 뒤 통일부 장관을 두 차례나 역임했다.

2000년 국정원장으로 재직 중 남북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내 '햇볕정책의 전도사'라는 평가를 받는 등 사실상 외교.안보.통일 분야의 사령탑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에 5억 달러를 불법 송금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돼 지난해 3월 대법원에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이 확정됐다. 불법 도청과 관련, 임씨는 "휴대전화 도청은 불가능했다"며 일관되게 부인했다. 신씨는 법조계 호남 인맥의 대표적 인물로 DJ정부 때 중용됐다. 5.6공 시절 대검 중수부장을 지내는 등 검찰 특수수사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수사통이다. 대검 중수부 과장 때 권력형 금융 사기사건이었던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 사건을 처리해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YS정부에서 법무차관에 기용됐으나 공직자 사정 과정에서 슬롯머신업계 대부였던 정덕진씨와의 친분관계가 드러나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98년 국정원 제1차장에 임명된 데 이어 국내담당 2차장을 거쳐 국정원장에 올랐다. 신씨는 "국민의 정부 시절 불법 감청은 단 한 건도 없었다"고 주장해 왔다.

하재식 기자

"황장엽.이철승씨 통화 도청
임 전 원장, 국내 정치 개입 지시도"
김은성씨 첫 공판서 공개

김은성 전 국정원 국내담당 차장은 14일 첫 재판에서 불법 도청과 정치 개입 등 임동원.신건 두 전직 원장의 불법 행위에 대해 상세히 털어놓았다.

김씨는 모두 진술에서 "국민에게 석고대죄하는 마음"이라며 혐의를 시인한 뒤 두 사람이 불법 도청을 몰랐을 리 없다는 주장을 폈다. 그 근거로 ▶원장은 수시로 도청 내용이 대화체로 요약된 보고서를 받았고▶원장실 직속 감찰실에서 수시로 각 부서 업무에 대한 감찰을 벌여왔으며▶국정감사 등에서 불법 도청 의혹이 제기돼 진상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 등을 꼽았다. 김씨는 "모든 책임은 차장.원장 등 지휘부에 있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2001년 초 국정원이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와 보수 인사인 이철승씨와의 통화를 도청한 사실을 공개했다. 이씨가 황씨에게 전화를 걸어 "신년하례식도 할 겸 떡국을 같이 먹자"고 제안했고 황씨가 수락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당시는 DJ 정부의 햇볕정책에 반대하는 황씨가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미국도 방문한다고 해서 떠들썩했다"며 "햇볕정책 주창자인 임 전 원장도 대북 강경론자인 황씨의 행보에 관심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임 전 원장의 지시로 국내 정치에 개입한 사실도 고백했다. 김씨는 "2000년 6월 임 전 원장이 '민주당 장성민 의원에게 경고를 하라'고 해 장 전 의원을 서울 양재동 소재 국정원 안가에서 만났다"며 "장 전 의원에게 '급격한 개혁 추구에 대한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장 전 의원은 당시 공천 문제로 불만을 품고 국회의원 당선 후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을 비난했었다.

김씨에 따르면 임 전 원장은 2000년 1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 홍걸씨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한나라당 이신범 전 의원을 회유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김씨가 이 전 의원을 만나 "왜 홍걸이를 못살게 구느냐. 좀 봐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현경 기자

DJ 측 "영장 즉각 취소하라"

14일 임동원.신건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해 검찰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하자 김대중 전 대통령 측은 "즉각 영장을 취소하라"고 반발했다. 김 전 대통령의 최경환 비서관은 "법에 의해 사필귀정으로 해결될 것으로 믿지만 부당한 사전영장 조치는 즉각 취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 비서관은 "5년 동안 미림팀에 의해 철저한 감시와 도청을 당한 국민의 정부 사람들이 도청 혐의로 책임을 추궁당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두 분 전직 원장이 도청과 관계없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반응은 묘했다. 열린우리당 전병헌 대변인은 "도주와 증거 인멸 우려가 없는 두 전직 국정원장에 대한 구속 수사는 부당하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는 불법 도청의 본류인 미림팀 수사와 형평성이 맞지 않을뿐더러 구속 수사 관행을 개선해 나가자는 검찰 취지에도 맞지 않다"며 "검찰은 엄정히 수사하되 불구속 수사를 하는 것이 맞다"고 강조했다.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도 "국가권력에 의한 도청은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한다"면서도 "이번 수사가 어떤 특정 정권에 대한 흠집 내기가 돼선 안 된다"고 했다.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도 "국민의 정부는 문민정부의 미림팀처럼 조직적 도청이 없었다고 본다"며 "두 원장이 김 전 대통령의 도청 근절 지시를 어기면서 도청에 관여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원내 1, 2, 3당 모두 검찰의 영장청구를 비판한 셈이다. DJ의 눈치를 보고 호남 민심을 의식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제4당인 민주노동당 김성희 부대변인만 "김 전 대통령이 국민에게 고백하는 심정으로 밝힐 건 밝히고, 책임질 부분은 책임져야 마땅하다"고 했다.

박소영.전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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