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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송씨 성씨의 고향(8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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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주자학의 거유」·「도학정치의 대노」·「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에 대한 평가는 그를 일컫는 칭호만큼이나 각도를 달리한다. 그러나 어찌했든 그는 조선조5백년 역사에 우뚝 선 거인이다.
『조선조 왕조실록에 한사람의 이름이 3천번 이상 나오기는 오직 우암 뿐』 이라는 것만으로도 그가 차지하는 역사적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은 조선이 태조 이성계가 내건 반도소국가주의의 비루한 국시를 3백년만에 내던지고 북벌-만주 옛 터전 수복-대륙대국가주의의 이상을 되찾았던 감격의 효종 10년 통치를 지나 방향을 잃은 민족에너지가 자체분열의 당쟁으로 빠져들어 망국으로 끝맺는 정체기에 들 때까지 30여번 우암은 이 나라 정치와 학계를 한 손으로 쥐고 흔들던 카리스마였다.
그러나 치열한 당쟁의 이전투구싸움에서 북벌이상의 국사였던 우암은 노론당파의 영수로 떨어졌고 사림의 종장으로 추앙되던 학문도 주자의 해설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기게됐다.

<30년간의 카리스마>
더우기 야만 만주왕조에 대한 적개심이 숙명의 사대모화의식으로 나타나 만동묘를 이룸에 이르러서는 그에 대한 평가는 또 한번 굴절하게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시 은진송씨가 배출한 가장 큰 인물이다.
사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보이지 않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사의 인물임에 틀림없다.
l607년 태어난 우암은 l633변 사마시에 장원, 벼슬길에 올라 인조 효종 현종 숙종의 네 임금을 섬기며 병자·정묘 양 호란을 겪고 서·남 노·소 붕당의 난세를 살았다.
그 가장 득의의 시기는 효종의 10년 통치기간. 북벌의 이상을 세운 효종이 우암을 오른팔로 삼아 나라 힘을 한데 모으면서 그는 정계의 제l인자가 됐다.
성균관 문묘에는 역사상의 석유 l8현이 배향되어 있다. 그중 한집안에서 두 사람이 배향되기는 광산김씨(사계 김장생·신독제 김집부자)와 은진송씨(우암 송시열·동춘당 송준길) 뿐이다.
은진송씨의 시조는 고려말엽 한림원 판원사를 지냈던 송인원. 그러나 그의 뿌리는 중국의 당나라에 두고있다.
「송씨상계보」는 우리나라 모든 송씨의 도시조는 당의 호부상서였던 송주은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가 언제 어떻게 우리나라에 귀화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 후 고려 때 그의 후손 송자영이 추익(여산군)·천익(은진군)·문익(서산군) 등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의 후손들이 번성. 우리나라 송씨의 3대 산맥을 이룬다.
은진송씨는 이들 3형제 중 둘째 천익의 후손. 그러나 송천익 이 후 세계가 실전되는 바람에 고려조에 판원사를 지내고 은진군에 봉해진 송대원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효종의 오른팔역할>
「여산」「은진」「서산」 등을 본관으로 하는 3집안은 본관만 다를 뿐 그 뿌리는 같다는 것이 송씨문중의 일반적 견해다. 때문에 송씨끼리는 본관이 달라도 통혼하지 않는다.
은진송씨는 조선조에 문과급제 75명, 무과80명, 정승2명, 대제학l명, 충신·열사 21명 등을 냈다.
조선 중종 때 성리학의 대가로 대사헌·이조참판 등을 역임하다 을사사화 때 윤원형 등에 의해 사사된 송인수,·윤원형 등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도승지·대사헌·이조판서 등에 올랐던 송기수, 병자호란 당시 강화성이 포위되자 자결한 충신 송시형 등은 조선초기에 가문의 맥을 이어온 인물들.
동춘당 송준길(1606∼1672)온 송시열과 함께 당대를 대표했던 성리학자였다. 효종 때 집의로 기용되어 당시 권세를 잡고있던 김자점을 탄핵하여 청서파의 집권을 가져오게 했다. 한편 효종의 북벌계획을 적극추진 했으나 김자점이 청에 밀고함으로써 실패, 벼슬에서 물러났다. 뒤에 다시 기용되어 대사헌, 병조, 이조판서 등을 지냈으나 「남인」과 「서인」의 당쟁이 격화되자 곧 사퇴하고 낙향, 학문연구로 여생을 마쳤다. 그는 송시열과 학문적 경향을 같이하는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율곡의 학설을 지지했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13촌 숙질간(송준길이 숙)으로 두 사람 모두 사계문하에서 동문수학, 다같이 학자로서 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노론의 쌍벽으로 문묘에 함께 배향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본관 달라도 금혼>
송규연(숙종조·예조참판)은 송시열·송준길 등과 함께 「삼송」으로 일컬어졌던 대문장. 그의 아들 송상기도 송시열의 문인으로 숙종조에 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지내다 신임사화 때 유배지에서 숨졌다.
송명흠(영조조·찬선)·송문흠 (영조조·형조좌랑) 등 형제도 유명하다. 이들 형제 중 아우 문흠은 문장과 서예로 명성을 떨쳤는데 이상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명필로 꼽힌다.
이밖에 송덕상(정조조·이조판서)·송환기(정조조·우찬성)·송근수(고종조·좌의정) 등이 조선후기에 돋보이는 인물들이다
고종조에 대사헌을 지냈던 송병준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참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으나 실현되지 않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자결 했다.
그의 동생 송병순 또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토왜」의 격문을 지어 전국8도에 돌렸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두문불출,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다 음독자결 했다. 그는 일제의 숱한 유혹과 협박을 물리치고 고고하게 절개를 지켰던 한시대의 양심이었다.
송학선온 일제의 암흑기에 방임운동으로 가문의 기백을 지켰다. 그는 1926년4월 일본총독 「사이또」의 암살계획을 세웠으나 실패,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당했다.
해방 후 은진송씨는 사회각계에 많은 인재를 냈다.
전 재무부장관 송인상, 제헌국회의원 송진백, 전 국회의원 송원영·송효준, 전 동아일보편집국장 송건호. 전 대한한의사협회장 송장현, 예비역육군소장 송석하, 송기철씨(경박·고대교수), 송민호씨(문박·), 송명관씨(전 서울지방법윈장·변호사) 등이 돋보이는 현대의 인물들이다.
▲다음주는 「해주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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