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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로버트 김' 구하려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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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996년 9월 미국 워싱턴에서 로버트 김이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자 안기부(국정원 전신)가 한국에 진출한 미국인 무기 중개상을 체포해 미 측과의 물밑협상을 시도했음이 밝혀졌다.

한.미 관계에 밝은 한 정보소식통은 13일 "안기부는 로버트 김을 석방시키기 위해 수사.국제국 중심으로 특수팀을 구성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특수팀에 참여했던 K씨도 "미국인 무기 중개상을 간첩 혐의로 체포하는 방안이 미국 측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지렛대라는 판단을 했다"고 설명했다. 안기부는 그해 10월 미국인 도널드 래클리프(당시 62세)를 집중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 군수산업체의 아시아 담당 이사였다. 서울 하얏트호텔에 묵으면서 한국군이 구입할 예정이었던 차세대 전투기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97년 4월 30일. 6개월간의 밀착감시 끝에 안기부는 그를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래클리프는 용산 미8군 영내로 피신했으나 수사망을 피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자료를 건네준 한국군 장교 1명, 민간인 2명이 군 기밀유출 혐의로 함께 붙잡혔다. 특수팀에서 일했던 K씨는 "지금은 무기 입찰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만 당시엔 모든 자료가 비밀이었다. 무기 중개상이 한국군 장교들과 접촉하지 않고 관련 정보를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래클리프가 간첩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미국인 무기 중개상이 한국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미 양국은 비공식 채널을 가동했다. 안기부는 미국 측에 '로버트 김에게 감형(減刑)조치를 내리면 래클리프를 석방할 용의가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에 리처드 크리스텐슨 당시 주한 미대사관 대리대사가 안기부장을 면담했다. 한국어가 유창했던 그는 권영해 안기부장에게 "그는 간첩이 아니다. 당장 석방하라"며 언성을 높였다고 한다. 두 사람 간에 어떤 '흥정'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K씨는 "윗선에서 이뤄진 일이라 우리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기부의 '로버트 김 구하기 작전'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공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로버트 김과 래클리프의 처지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로버트 김은 미 법원에서 국방기밀 취득 음모죄의 법정최고형인 징역 9년을 선고받은 뒤 복역해야 했다. 반면 래클리프는 97년 7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죄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체포된 뒤 석 달 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최원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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