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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일본 하청 그만 두고 … '망해도 좋다' 시작한 게 태권V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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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달려 로보트야~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30~40대라면 누구나 한 번쯤 흥얼거렸을 바로 그 노래,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V’의 주제가다.

김청기 감독은 요즘 시간이 날 때마다 동양화 속 태권V를 주제로 수묵화를 그린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잘 어울리지 않냐”며 익살스런 표정을 짓는 김 감독. 18년 동안 애니메이션계를 떠나 있던 그가 새로운 작품을 준비 중이다. 김 감독은 “아직 나는 현역”이라며 “마지막으로 3D 작품을 꼭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1976년 개봉된 로보트 태권V는 애니메이션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나온 첫 로봇 애니메이션이다. 태권V를 탄생시킨 김청기 감독(74)은 태권V부터 97년 ‘의적 임꺽정’까지 50여 편의 애니메이션과 어린이 영화를 제작해 한국 애니메이션의 대부 같은 존재다. 하지만 동시에 ‘표절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저작권 개념조차 모호했던 70~80년대, 한국은 애니메이션 분야에선 미국·일본의 하청기지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하청 받았던 작품을 구성만 약간 바꿔 그대로 극장에 내걸기도 했다. 김 감독이 걸어온 길엔 한국 애니메이션의 명과 암이 함께 있었다.

한국 애니메이션 1세대 김청기 감독

열여덟 살, 만화가로 데뷔

1950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은 먹고 사는 일이 급급했다. 오늘 하루 한 끼를 때울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던 시절이다. 그런 한국에서 만화는 어린이들의 유일한 문화 콘텐트였다. 학교 앞 문방구에 들러 만화를 보는 것이 아이들에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과였다. 김 감독도 그랬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나, TV가 흔하기를 했나. 애들한텐 만화가 최고였지. 한 번 봤던 거를 보고 또 보고, 몇 번이고 닳도록 봤어.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

 그는 41년 서울 만리동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일본인이 떠나고 남은 집을 불하받은 적산가옥에서 살았다. 그 집은 벽면이 온통 하얀색이었다. 김 감독의 놀이터는 그 하얀 벽이었다. “하얀 벽에다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했어. 아버지는 그런 나를 혼내지 않고 ‘그림 참 잘 그린다’고 칭찬해주셨지. 그 칭찬이 만화가를 꿈꾸게 된 동기가 됐어.”

 58년 18세 때 그의 첫 작품인 만화 『쾌걸 조로』가 출간됐다. 만화가 김청기의 탄생이었다. 반응이 좋았다. 당시 공무원 월급이 6000원 정도였는데, 만화 원고료로 1만2000원을 받았다. 그에게 만화를 가르쳐준 선생님은 없었다. 혼자 만화를 보고 습작하며 실력을 길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만화가로 대성해보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만화가 사회악이었던 시대

1년에 4~5개 작품을 내면서 벌이가 괜찮았다. 포기했던 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시작했고, 61년엔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예술대) 회화과에 진학했다. 만화가가 평생의 직업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60년대에 들어 만화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박정희 군사 정권 시절 만화는 사회악으로 분류됐다. 퇴폐 만화를 근절하고 건전 만화를 육성한다는 명목 아래 사전 검열이 강화됐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그리고 싶은 건 다 막혔어. 심지어 ‘이 자식’ 정도의 표현도 욕으로 분류돼 쓰면 안 됐지. 상대방에게 총을 겨누는 장면 같은 건 무조건 들어냈어. 아니, 그렇게 해서 어떻게 재미있는 만화를 그릴 수가 있겠어. 내가 뭐 하는 건가 싶더라고.”

‘슈퍼 홍길동 3’(89년) 촬영 현장.

회의감이 밀려왔다. 만화에 대한 열정은 점점 식었다. 그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67년 첫 극장용 국산 장편 애니메이션인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을 시작으로 한국에도 애니메이션 제작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당시 유명 영화사였던 세기영화사가 68년 개봉을 목표로 ‘손오공’ 제작 계획을 발표하고 애니메이터를 모집했다. 이거다 싶었다. “애니메이션은 만화하곤 완전히 다른 세상이거든. 평면 속 그림이 아니라 연속된 동작, 음향 …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잖아. 눈이 다시 번쩍 뜨이더라고.”

일본 애니메이션 하청의 서러움

67년 3월 세기영화사에 애니메이터로 입사했다. 출판만화를 그리면 월 3만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지만 모두 포기했다. 당시 공무원 월급이던 8000원을 월급으로 받고 애니메이터로 일을 시작했다. 김 감독을 비롯해 67~68년경에 애니메이션 작업에 뛰어든 사람들이 한국 애니메이터 1세대다.

‘3단 변신 로보트 84 태권V’(84년)를 구상하고 있던 당시의 김 감독.

‘손오공’ 팀에서 5개월을 작업했다. 며칠씩 집에 못 들어가는 고된 작업도 꿋꿋이 버텼다. 하지만 김 감독은 무언가 계속 허전했다. 한국은 애니메이션의 불모지였다. 당시에도 애니메이션은 미국·일본이 주도했다. 그는 일본의 제작기법과 공정을 배우고 싶었다. 그때 기회가 찾아왔다. TBC 방송국에서 일본 TV판 애니메이션 ‘황금박쥐’(1967년 1월 24일~1968년 3월 12일까지 방영)의 하청 작업 팀을 모집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하청을 받아 제작해주고, 그것을 다시 역수입해 TV에 방영하는 방식이었다. 한국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하청이 시작되는 계기였다.

 하지만 김 감독의 TBC 생활은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그는 “하청의 서러움을 그때 느꼈다”고 회고했다. 비록 하청이었지만 김 감독은 그게 마치 자신의 작품인양 욕심을 냈다. 동작을 더 부드럽게, 자연스럽게 만들고 싶었다. “주인공 황금박쥐가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이 있었어. 원래 제작 계획은 1초에 8장의 그림만 들어가는 거였는데, 동작이 매끄럽지가 않은거야. 10장, 12장으로 그림을 늘려보니 동작이 괜찮아지더라고. 그런데 일본 측에서 곧바로 중단 지시가 내려왔어. 제작비가 더 든다는거지. ‘아 하청이 이런거구나’ 싶더라고.”

 다시 ‘손오공’ 팀에 합류했다. 발전된 기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손으로 우리 작품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김 감독은 “언젠간 내 작품을 만들어보겠다”는 의지를 가슴에 품었다.

‘로보트 태권V’ 1976년 외화 통틀어 흥행 2위

76년 고(故) 유현목 감독이 김 감독을 찾아왔다. 한국 기술로 로봇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보자는 제안이었다. 유 감독이 제작자로 나서고 김 감독이 작품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67~69년까지 간간이 시도됐던 국산 애니메이션은 극장 흥행에선 실패했었다. 70년대 들어 애니메이션 제작 시도는 중단됐고 투자자들은 애니메이션을 외면했다. ‘과연 할 수 있을까. 까짓 거 망하기밖에 더 하겠어.’ 김 감독을 필두로 당시 최고로 인정받던 고(故) 최창권 음악감독, 김벌래 음향감독이 팀에 합류했다.

1988년 작품인 ‘바이오맨’ 제작 당시 태국 로케이션 중인 김 감독(왼쪽 첫 번째).

한국에서 창작 로봇 애니메이션은 시도된 적이 없었다. 당시 일본 작품인 ‘마징가 제트’(1975년 8월 11일~1976년 2월 23일까지 MBC에서 방영)가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투자자로 나선 지방 흥행사들은 노골적으로 애니메이션 제목을 마징가로 짓자고 했다. 일본 작품을 그대로 베끼자는 제안이었다. “그때는 하청작업을 했던 일본 작품을 그대로 새로운 작품인양 극장에 내거는 경우도 많았어. 투자자들은 그게 확실하고 돈이 되니까 그런 요구를 계속했던 거야.”

 김 감독은 투자자의 제안을 거절했다. 대안이 필요했다. 시나리오 작가 지상학씨와 당시 서울 광화문 국제극장 뒷편 여관에서 한 달을 낑낑대며 태권V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한국 고유 무술인 태권도를 구사하는 로봇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고, 징·꽹과리·가야금·해금 등 한국 고유의 소리로 한국적 색채를 입혔다. 겨우 투자가 확정됐지만 투자 규모는 형편없었다. 투자금은 6개월의 제작기간 동안 월 진행비 50만원씩, 겨우 300만원에 불과했다.

 태권V 제작에 들어간 돈은 5200만원에 달했다. 태권V는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한국의 성공 사례가 필요했어. 우리나라도 애니메이션이 흥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야.” 김 감독은 당시 사당동 집을 담보로 맡기고 1800만원을 대출받았다. 간간이 CF나 기록영화로 벌었던 돈은 모두 태권V 제작비로 돌렸다. 제작비 마련을 위해 여기저기 손을 빌려 겨우 돈을 마련했다.

 76년 7월 24일 ‘로보트 태권V’가 개봉됐다. 대흥행이었다. 그해 서울에서만 28만여 명이 들면서 한국영화 중엔 1위, 외화를 통틀어선 2위의 흥행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김 감독에게 돌아온 것은 빚뿐이었다. 대부분의 흥행 수익은 판권을 산 지방흥행사가 가져갔다. 그땐 투자구조가 그랬다. 흥행수익에 따른 러닝 개런티 개념조차 없었다. 제작사와 감독의 입장에선 그렇게라도 판권을 팔아 초기 제작비를 마련하는 게 더 시급한 문제였다. 서울 지역 흥행수익만 제작자와 김 감독에게 돌아왔다. 그래도 남은 빚이 3000만원이 넘었다.

 돈은 엉뚱한 사람들이 벌었다. 태권V가 흥행하자 영세 완구업체들이 책받침·노트 등을 저작권자 허락 없이 마구 만들어 팔았다. 저작권 개념조차 모호했던 때였다. “한 번은 어느 부산 완구업체가 태권V로 큰 돈을 벌었다길래 사람을 보내봤어. 미안하다며 300만원을 저작권료로 주더구만. 그렇게 찾아가면 대부분은 이미 제품 만들어서 팔아 먹고 도망치고 없어. 그 300만원이 유일하게 태권V로 받은 저작권료야.” 태권V는 그에게 감독이라는 이름과 빚을 동시에 안겨줬다.

일본 로봇 베끼면 제작비 대겠다던 완구업자

76년 ‘로보트 태권V’가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뒀지만 80년대 한국 애니메이션계는 다시 침체의 길로 들어섰다. 컬러 TV가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비디오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TV에선 미국·일본의 애니메이션이 시청자를 사로 잡았다. 태권V가 보여줬던 가능성은 투자 환경 조성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한국 애니메이션계는 살 길을 찾아야 했다. “80년대 미국·일본 하청 물량이 엄청나게 늘기 시작했어. 중심은 극장에서 TV로 옮겨갔고, 아직 한국은 충분하게 성숙하지 못했는데 미국·일본의 TV판 애니메이션이 물밀듯이 들어왔어.”

 김 감독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80년 야심차게 준비했던 ‘꼬마어사 똘이’가 흥행에 실패했다. 김 감독이 이끌었던 프로덕션 ‘서울동화’는 수익 악화로 문을 닫기 일보 직전이었다. 81~82년에 걸쳐 그는 달콤한 제안을 여러 번 받았다. “한 완구 회사가 나를 찾아오더니 일본 로봇을 그대로 베낀 제품을 보여주면서 이거랑 똑같이 만들어 달라는거야. 그러면 제작비의 절반을 대겠다고.” 디자인 능력이 부족했던 한국의 완구 회사가 일본 제품을 그대로 베낀 뒤 애니메이션을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려 한거다. 김 감독은 “선택을 해야 했다”고 회상했다. 감독의 자존심을 지키고 서울동화의 문을 닫을 것인가, 아니면 자존심 따윈 버리고 살아남을 것인가. 김 감독은 후자를 선택했다.

 욕 먹을 각오를 하고 완구회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82년 ‘슈퍼 태권브이’ ‘초합금로보트 쏠라 1, 2, 3’, 83년 ‘스페이스 간담V’, 85년 ‘로보트군단과 메카3’, 그리고 86년 ‘우뢰매’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로봇 애니메이션의 맥을 어떻게든 잇고 싶은데 투자금을 모을 방법은 없었고 … 결국 부끄러운 선택을 하게 된 거야.” 그는 현실과 타협했다. 그는 “내게 80년대는 부끄럽고 무지했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87년부터 91년 사이 한국 애니메이션계는 다시 한 번 기회를 맞는다. TV 방송사들이 출판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떠돌이 까치’ ‘아기공룡 둘리’ ‘달려라 하니’ ‘머털도사’ ‘날아라 슈퍼보드’ ‘영심이’ 등 국산 TV판 애니메이션이 잇따라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제작업체들은 방송사들의 외주 제작업체에 불과한 처지였다. 창작 애니메이션에 대한 투자는 여전히 활성화되지 않았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늘었는데 투자 환경은 바뀌지 않았어. 그냥 방송사의 외주를 받아 근근이 살아남았던 거지. 90년대에도 완구·문구류 회사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았어. 그러니 애니메이션 전문업체들이 뭘로 먹고 살겠어? 미국·일본의 하청을 받아서 겨우 먹고 살 수밖에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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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의적 임꺽정 이후 작품 활동 중단

김 감독은 97년 ‘의적 임꺽정’을 마지막으로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 90년대 초반 비디오 작품에 주력했다. 제작비 조달은 여전히 어려웠다. 비디오 판매·대여 비용의 수금을 약속했던 지방 판권업자들은 자금 회수를 차일피일 미뤘다. “지방 판권업자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잘해야 하는데, 내가 영업이 서툴렀어. 자금이 제때 회수가 안 되면서 어음으로 작품을 이어갔는데, 그게 결국 10억 어음 부도로 이어졌어.”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다. 그리고 시대가 변했다. 90년대 중반부터 ‘토이스토리’ 등 미국 3D 애니메이션이 국내를 강타하면서 3D 애니메이션이 대세가 됐다.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는 3D를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도들이 이어졌고 2001년 ‘마리이야기’ 2003년 ‘원더풀 데이즈’ ‘뽀롱뽀롱 뽀로로’ 등 국산 3D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그렇게 애니메이션계에서 멀어졌다. 간간이 대학특강과 학습만화를 그리며 애니메이션 업계의 언저리에 머물렀다.

 그런 그가 다시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지하세계와 지상세계 두 세계로 나뉜 세상을 무대로 그린 3D 작품을 준비 중이다. 18년 만의 복귀다. 아직 투자도 확정되지 않은 불안한 복귀 준비다. ‘뽀롱뽀롱 뽀로로’ ‘빼꼼’ ‘라바’ ‘넛잡: 땅콩 도둑들’ 등 한국 3D 애니메이션의 연이은 성공은 그의 마음을 다시 움직였다. “지금 한국 애니메이션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야. 캐릭터 산업 등 투자 환경도 많이 달라졌고.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정말 내 작품을 해보고 싶어.”

글=정현진 기자 correctroa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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