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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발굴자료와 새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무대-의열단(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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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야산의 항일운동과 함께 의열단의 활동중 특이한 것은 전중의일육군대장 저격사건이후의 오성륜의 행적이다.
오성륜의 행적은 그가 엄격한 테러리스트로 모든 행동이 비밀리에 이뤄졌기때문에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나타날뿐이다.
1900년 함북태생인 그는 어려서 부친을 따라 간도로 이주, 연길근교에서 농사를 지었다.
3·1운동때 용정의 중학2년이었던 그는 독립군의 일원으로 쌍권총을 차고 군자금모금에 나선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3·l운동의 격랑이 채 가라앉기전 상해로 혼자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한다.
의열단원으로서 오성륜이 관계한 최초의 사건은 「압록강대철교폭파계획」이다.

<중학때 독립운동>
의열단은 상해에 몇개의 폭탄제조소를 갖고있었고 폭탄제조의 기술지도는 「마르틴」이 담당했다.
독일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조국인 독일과 일본을 싫어한 니힐리스트였으며 테러리스트 예찬가이기도 했다고 한다.
압록강대철교폭파계획은 의열단의 「제1자 밀양폭한사건」으로 알려진 일제요인암살및 주요도시의 전략적 건축물의 폭파계획과 함께 추진했으나 밀양사건이 실패하자 압록강대철교폭파계획도 준비단계에서 그쳤다. <이상 유석현증언>
오성륜이 테러리스트로 두각을 나타낸것은 전중의일 육군대장 저격사건때다.
오성륜은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의열단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탈출한뒤 더욱 유명해져 간도의 한국인 청소년들 사이에는 그의 얘기가 신화처럼 전해졌다.
그는 감옥을 탈출한뒤 독일로갔다.
이때의 오성륜의 행적은 전혀 알려져 있지않다.
단지 베를린에서 살았다는 것과 독일처녀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 전해질뿐이다.
오성륜은 독일체재중 소련영사관의 도움으로 22년 늦가을 모스크바로 가서 쿠로베(동방근로자공산대학)를 다녔다.
코민테른(국제공산당)소속의 이 대학에는 이미 한인들이 수학중이었다.
한국인으로서 가장 먼저 쿠토베에 들어간 사람은 이동휘가 이끄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에서 파견한 사람들이었고 그다음에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연해주에서 모집한 30명가량의 한인들이 공부했다.
행동파였던 그는 쿠토베의 최단기 코스를 거친뒤 간도로 이동휘를 찾았다.
그무렵 이동휘는 모스크바 지침에따라 고려공산당은 해체당하고 무장조직 적기단만을 이끌고 있었다.
적기단은 나중에 신민부와 합동, 김규식이 단장을 맡았던 단체다.
오성륜은 적기단의 주요간부로 일하며 의열단의 옛동지들과도 협력했다.
적기단과 의열단이 협력한 테러활동으로 「일본황태자결혼식장 폭파계획」 이 있다.
의열단의 제3차폭파계획으로도 알려진 이사건은 관동대지진에서 희생된 한국인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황태자와 고관의 암살및 주요건물의 폭파를 목적으로 했다.
오성륜은 이를 위해 23년12월 야산과 협의, 구여정 김재현(김시현의동생), 이종암등 11명을 국내에 잠입시켜 3만원의 자금을 모금하려했으나 구여순 김재현 오세덕 문시환등 6명이 종로경찰서에 체포됐다.
이종암은 다른 의열단원들을 먼저 국내에 잠입시키고 오성륜과 사건계획을 의논키위해 영고탑에 들렀기때문에 화를 피했다.
이종암은 그후 25년10월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모금을 위해 활동하다 11월5일 경북경찰부에 체포됐다.
오성륜은 그후에도 의열단과 몇차례외 사건을 계획했으나 실패한것으로 전해진다.
25년1월 러시아와 일본간에 수교조약이 체결되고 노·일양국의 치안을 해치는 행동을 서로 금한다는 규정을 넣어 독립운동이 어렵게되자 이동휘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스찬지방의 한 촌으로 은퇴해버렸다.
활동무대를 잃은 오성륜도 눈을 중국으로 돌렸다.

<독일처녀와 사랑>
중국은 24년이후 국공합작이 시작돼 광동을 중심으로 북벌준비가 이뤄지고 있었다
많은 한인들이 중국혁명의 성취가 한국해방을 가져온다는 기대에서 광동으로 물려들었다.
김야산이 의열단원을 이끌고 광동으로 간것도 이때다.
오성륜은 26년 광동으로 갔다.
그는 황보군관학교에서 기초노어를 가르쳤다.
광동시절의 오성륜은 가장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는 광동에 결성돼있던 조선혁명청년동맹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
27년 상해남경·북경·광동·무한의 한국인을 중심으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위원장 변동화)이 조직됐을때 그는 광동지역을 대표하는 중앙집행위원이 됐으며 함성이란 이름을 썼다.
제1차 국공합작이 깨어지고 27년12월11일 광동 코뮌이 탄생하자 오성륜은 이에 가담했다가 국민당군에 쫓겨 중공의 이른바 소비에트지구로갔고 이곳마저 국민당군에 포위되자 다른 패잔병과 함께 향항으로 탈출했다.
그는 이해10월 상해로 다시 돌아가 약산동의열단과도 재회한다.
오성륜은 상해에서 광동 코뮌때의 동지 금산(장지악)과 함께 상해의 한인공산주의자의 조직에 관계했다.
이때 상해의 한인공산주의자들은 여운형과 조봉암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었다.
금산은 오성륜의 정신적후배를 자처한 인물로 김약산과도 친분을 가졌다.
그는 나중에 이 시기를 회상해 김약산과 오성륜의 성격등을 비교했다.
『김약산은 고전적 테러리스트였다. 냉정하고 대담했으며 개인주의적인 남자였다. 그는 말없이 항상 조용했다. 잘 웃지도 않았으며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루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좋아했고 「톨스토이」의 작품은 모두 읽었다.
그는여자들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인처녀들은 그에게 경모의 정을 갖고있었다.
김약산은 대단한 미남자로 로맨틱한 얼굴이었다.
조선인 「톨스토이」심취자중에는 테러리스트가 많이 나왔는데 그것은 「톨스토이」 작품에서 해결되지못한 사회적 모순을 행동으로 해결한다는 사고에서였다.
김약산은 확실히 구별되는 2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친구들에개는 매우 친절하게 대했지만 무서울 정도로 잔인한일도 했다.
오성륜은 잔인하지는 않지만 정열적인 성질이었다.
약산이 의열단의 지도자였을때 오성륜은 때때로 약산에 반대해 투쟁생한일도 있었다.
그는 굉장히 강한 성격으로 지도자의 자질을 타고났다.
그는 철저한 비밀형의 남자로 우리들이 혁명공작을 함께 할때 오성륜은 비밀의 지도자였고 내가 표면에 나섰다.
그와는 몇번이나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그의 상세한 경력을 모른다.
그는 결코 말을 믿는자가 아니고 행동의 사나이였다.
쉽게 다른 사람을 믿지않았고 한번 결심하면 변하지않는 성격이었다.』
오성륜은 상해에서 1년남짓 머무르는동안 김충창의 소개로 한여인을 만나 사랑한것으로 전해진다.
김충창은 금강산 불승출신으로 31운동때 시위에 가담해 1년여의옥고를 치렀다.
그는 그후 중국에건너가 광동에서는 금산등과 같이 잡지를 발행한 인물이다.
김충창이 오성륜에게 소개한 여인은 인도지나에서 혁명운동에 관계하다 추방돼 상해에와있던 한국여인이었다.

<말보다 행동으로>
1929년이래 그는만주에서 중공당과 연결된 항일활동을 했다.
5·30간도사건직전 오성륜은 중공당으로부터 반석현위의 한인들을 무장시켜 남만에서 폭동을 일으키라는 지령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중국공산당은 극좌모험주의노선인 이립삼코스를 달리고있을때다.
그러나 오성륜은 남만의 정세로보아 농민폭동을 일으킬 경우 결국 수많은 한인들이 희생되리라는 판단에서 농민폭동을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
그랬지만 동만특위 예하 간도지방에서는 폭동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한인농민 수백명이 학살당하는 참화만을 자초했다.
오성륜은 30년대의 10년을 남만치역에서 게릴라 활동을 했다.
그랬지만 39년10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만주지역에 산재해 있던 여러 항일게릴라부대는 괴멸되었다.
「빗질작전」이니 「쇠파리작전」등 집요한 토벌전으로 항일게릴라는 깡그리 무너진 것이다.
일본군은 처음엔 오성륜을 총살하려 했다가 회유키로 방침을 바꿨고 그래서 간도 화룡현에 살고있던 당시 61세의 오성륜의 부친을 데려와 20년만의 부자상봉을 주선하기도 했다.
일본신문은 오성륜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지고 일본제국에 협력키로 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명영의 「오성륜기」에서>
오성륜의 투항은 앞이 보이는 일제패망을 내다보면서 살아남기위한 일시적 방편이었지만 만주국 치안부고문이란 강요된 직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무렵 한 친구가그를 만나려하자 『내가 이꼴이 됐으니 만나볼 면목이 없다』고 했다.
그는 8·15직후 귀국길에 올랐으나 변절자로 몰려 비극의 최후를 마쳤다. <석현의 회고>
『그는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항일운동가였고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공산주의 쪽으로 기울였을 뿐이다.
그는 뛰어난 항일투쟁에도 불구하고 친일파와 아편장수들의 농간에 휘말려 비극적인 최후를 마쳤다.
일제 말엽 나는 당시 간도성 차장으로 있던 사종길 유홍순의 집에 가 있었는데 그때 관동군 특무대의 귀순공작이 한참이었다.
그래서 많은 독립지사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귀순했으나 해방을 앞두고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유홍순의 집 뒤에도 이러한 귀순자 40여명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귀순자에게는 집과 농토, 농자금 1만원을 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군부측에서는 처음 귀순공작때 약속했던 것과는 달리 이들을 모두 처형하려 했다.
그러자 유홍순은 나중에 만주국 참의까지 지냈음에도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만약 군부에서 이들을 죽이면 자기는 만주의 80만 한국인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겠다며 위협하기도 하고<그러면 조선통치를할수없다>고 설득하기도 했다.
이문제는 나중에 잘 해결되었고 귀순자들 대부분은 해방후 고국으로돌아왔다.

<열차서 끌려내려>
오성륜도 이때 귀순해 열하성관동군 특무대에서 일했으나 마음은 조국독립뿐이었다.
열하성 특무대장은 「이나바」(도섭)대위였다.
오성륜은 해방이 되자 연안에서 한국으로 오는 열차를 타기위해 열하성역에서 기다리다가 아편장수들에게 끌려가 악질이라는 이유로 죽음을 당했다.
당시 아편장수들은 일본군에서도 엄격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관동군에 돈을 뺏기고 투옥당한 아편장수들은 오성륜을 밉게보고있었다.
오성륜은 김찬과 함께 오려했으나 열차가 떠나려할때 오성륜이 끌려내려갔고 중과부적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혼자 귀국했다.
김찬은 조선공산당의 창당 멤버였지만 광복후 조봉암과 함께 민족진영에서 반공투쟁을 했다.』

<고침><29회>의열단(5)회 기사중 김시현을 회유, 민주당 음해를 기도한 이남수(일명 이태희)는 특무대 대령이 아니고 예비역 중령으로 특무기관원을 사칭했음이 4·19이후 확인되었으므로 바로 잡습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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