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기억해, 우리가 그들에게 반한 시간 ② 장성란 기자가 훔치고 싶은 태도

중앙일보

입력

[매거진 M] 기자들의 특별한 인터뷰
설에는 가까운 사람들과 덕담을 나누며 서로의 복을 기원합니다. magazine M은 이번 설을 맞으며 독자 여러분께 어떤 인사를 전할까 고민했습니다. magazine M 기자들에게 가장 큰 자산은 매주 인터뷰로 국내외 영화계 주역들을 만나는 경험, 그 자체입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진실한 말 한마디가 한 해, 아니 평생 마음에 담아둘 기억으로 남기도 합니다. 바쁜 하루하루에 지치다가도 그 소중한 기억이 일깨우는 메시지에 다시 힘을 얻고는 하죠. 독자 여러분께 그 귀한 기억을 나눠 드립니다. 을미년 한 해, 이 기억들이 때때로 여러분께 힘을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장준환 감독 2013년 10월│33호] “피아노 연주에 빗대자면, 음이 몇 개 틀렸다고 불안해하지 않으려 한다. 연주하는 순간을 관객들과 함께 신나게 즐기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2003) 이후 10년 만에 두 번째 장편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2013, 이하 ‘화이’)를 내놓은 장준환(45) 감독을 만났을 때였다.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데뷔작’이라 불리는 전작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리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그가 내놓은 답이다. 아침 일찍 부인인 배우 문소리에게 이끌려 미용실에 다녀왔다는 그는 흡사 어느 교향악단의 지휘자처럼 구불거리는 머리를 하고 사람 좋게 웃었다.

‘지구를 지켜라!’의 발칙한 패기와 다부진 연출에 감탄했던 관객으로서 ‘화이’는 약간 아쉬운 작품이었다. 인간의 폭력성을 심도 있게 다룬 이야기였지만, 중요한 대목에서 그 긴장이 무너졌다. 그 아쉬움을 담아 던진 질문이었는데, 그의 답에서 지난 10년의 소중한 깨달음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지난한 시간이 그를 괴롭히는 동안에도 그는 감독으로서 가장 귀중한 마음가짐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 자신이 누구보다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 만들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어느 때보다 바로 지금 그의 다음 영화를 애타게 기다리는 이유다.

[이시이 유야 감독 2015년 1월│98호] “인생은 희망으로 가득하다고 말할 만큼 난 천진난만하거나 오만하지 않다. 만약 희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람과 같은 것이어서 순간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지, 영화에서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이시이 유야(32) 감독은 그가 만든 영화와는 꽤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연출한 ‘이별까지 7일’(1월 15일 개봉)은 한 가족의 절망적인 현실을 담담하면서도 집요하게 파헤치는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는데, 인터뷰 내내 그는 헐렁하게 굴었다. 웬만한 질문에는 농담 식의 짧은 답이 돌아왔다. 그에게 영화에서 절망과 희망을 그리는 원칙 같은 게 있냐고 물었다. 그가 이런 답을 들려줬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영화와 똑 닮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거나 영화에 그려서는 안 된다 생각하고, 그 믿음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 말이다. 입과 귀가 온갖 미사여구로 가득 찬 날이면 이시이 유야 감독에게서 봤던 정직함과 엄격함을 떠올린다. ‘진짜’를 찾는 마음으로.

[소설가 아사이 료 2014년 7월│70호] “전업 작가가 되는 순간, 나 스스로를 창조적이라 여길 것 같다. 난 사실 보잘 것 없는 사람이다. 아마 다른 작가들도 나 같은 마음인데, 짐짓 창조적인 척하고 있는 게 아닐까.”

2013년 『누구』로 나오키상을 받았을 때 아사이 료(26)의 나이 24세, 전후 최연소 기록이다. 현재 일본 문단에서 가장 촉망받는 작가인 그를 어느 누가 보잘 것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바로 그가 자신을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 소개했다. 그의 첫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일본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2012,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를 홍보하기 위해 서울을 찾은 그는 며칠 동안 촘촘히 이어지는 인터뷰 일정을 성실히 소화했다. ‘아이돌 놀이’를 하는 것 같다면서 개구쟁이처럼 헤헤 웃었다. 더구나 그는 당시 3년째 직장에 다니며,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 전 2시간씩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줄곧 무언가를 써왔지만, 위대한 소설가가 되겠다는 열망에 삶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신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특별해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 어떤 예술가보다 스스로 평범하다 말하는 그가 훨씬 싱그럽고 건강해 보였다.

장성란 기자, 사진=STUDIO 706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