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 산」 국립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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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9일 참극을 빚은 랭군의 아웅산 국립묘소는 버마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아웅·산」과 그외 참모 8명이 독립직전에 암살되어 묻힌곳.
영빈관과 수행원들이 투숙한 이냐레이크호텔에서 남쪽으로 4·8km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버마불교의 메카인 세다곤 파고다의 북쪽에 있다.
1935년 랭군대학학생이었던 「아웅·산」은 버마의 현지도자인 「네·윈」, 독립후 초대 수상이었다가 「네·윈」의 군사혁명으로 축출된「우·누」등과 함께 타킨당 (버마어로 주
인이라는 뜻)이란 독립단체를 결성했다.
30명의 멤버로 구성되어 일명 「30인용사회」로 불리는 이 조직은 민족주의를 내걸고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l940년 버마진출을 위해 비밀공작을 하던 일본군의「스즈끼」(영목경사)대좌와 손을 잡게됐다.「스즈끼」 대좌의 주선으로 이들 30명은 일본으로 건너가 군사훈련을 받은 다음 1941년12월 일본군과 함께 버마에 진주했다. 이들은 이듬해 일본군의 도움으로 영국군을 몰아냈으나 일본이 약속대로 독립을 시켜주지않자 다시 반일운동을 전개했다.
45년 일본의 후퇴이후 다시 영국이 들어오자「아웅·산」은 반파시스트인민해방동맹 (AFPFL)을 결성, 정력적인 교섭을 벌여 47년1월 런던에서 「1년내에 완전독립을 약속하는「아웅·산=애틀리」협정을 조인하는데 성공했다.
이 협정후 사실상 독립정부의 수상역을 맡게된「아웅·산」은 47년7욀19일 독립후의 국가
건설을 논의하기위해 내정된 각료들과 각의를 열고 있었다. 상오10시40분 돌연 군복을 입은 4명의 청년이 난입, 자동소총을 발사해「아웅·산」과 8명의 각료가 즉사했다.
암살자는 40년 영국인에 의해 수상에 임명됐던 우익정치가 「우·소」로 판명됐다. 「아
웅·산」의 나이 32세였다. 그의 죽음으로 버마는 지도자를 잃었고 정치혼란과 종족간의 내
전이 가속화했다.
그해 9월 「아웅·산」과 8명의 장군을 위한 아웅산국립묘지가 건립되었고 버마는 7월19일을「순국자의날」이란 국경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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