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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협력회사, 2인3각의 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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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반도체는 사업 특성상 스스로 협력회사가 되기도 한다. 노키아, IBM 등 글로벌 업체 주관 행사에 필자는 협력회사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다. 덕분에 대기업과 협력회사의 관계를 비교적 잘 이해하게 됐다. 태생적으로 양자의 이해는 충돌하게 마련이다. 좀 더 양질의 부품을 더 싼 가격에, 제때 공급받기를 원하는 건 본능이다. 협력회사는 거래처를 안 놓치려고 '울며 겨자 먹기'로 마진을 희생시키고, 이는 품질의 희생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이뤄진다. 'Win-Win' 아닌 'Lose-Lose 게임'이다.

하지만 반도체에 관한 한 상황이 달라졌다. 수년 전만 해도, 전자기기 업체는 독자적으로 사양을 결정한 뒤 이러이러한 반도체를 공급해 달라고 사후에 통보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지금은 반도체가 기기 설계 과정부터 참여, 출시 시기까지 함께 결정한다. 반도체가 정보기술(IT) 산업 전체를 드라이브하는 핵심이 된 것이다. 우리가 단순 '부품 공급자'가 아닌 '전략적 파트너'로 바뀐 것은 당연하다. 우리와 협력회사의 관계도 같은 논리다. 우리가 개발한 세계 최초 기술을 상품화할 장비 역시 세계 최초일 수밖에 없다. 개발 초기부터 이들과 상의하지 않고, 이들을 그저 원가절감의 대상으로만 인식해서는 IT 신시장을 우리 의도대로 창출하기 어렵다.

필자는 반도체협회 회장으로도 일한다. 협회 일을 병행하다 보니 문제점이 자꾸 눈에 띄고, 해결책이 만만치 않아 스트레스가 쌓인다. 반도체 장비와 원부자재 국산화 문제가 대표적이다. 특정산업이 발달하면 주변 인프라가 동반 성장하는 게 일반적이다. 미국.일본.유럽이 그렇다. 우리의 반도체는 세계 톱클래스지만, 주변 산업은 아직 아니다. 그나마 30년 전 초창기에 비해 지금은 조립장비 일부 및 재료의 절반 정도를 국산화하고 있어 다행이다. 메모리 분야에서만큼은 이들 국가보다 한참 앞섰으며, 전 세계에서 반도체 투자를 가장 많이 하는 우린데, 이제는 세계 수준의 협력회사 하나쯤은 가질 만하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가용 자원을 효율적으로 조직화, 특히 장비업체의 선진화를 위한 구체적인 지원 프로그램을 하루속히 작동시키자. 대기업의 노력만으론 어렵다. 정부와 학계가 같이 나서야 한다. 협력회사 당사자들 역시 자체 기술력 확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협력회사 선정 기준은 단가보다는 품질이어야 하며, 과정은 투명하고 공개적이어야 한다. 쇼핑하는 듯한 구매가 아니라, 개발 단계부터 공동으로 참여, 예술의 경지로까지 승화시키는 구매여야 한다. 협력회사와는 '평등의 관계'로 인식, 마음으로 먼저 다가가야 함은 기본 중 기본이다. 협력회사 역시 대기업이 "제발 당신 회사 제품 좀 쓰게 해 주십시오"라고 매달릴 정도가 돼야 한다.

대기업과 협력회사의 관계는 함께 뛰는 '2인3각 경기'다.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협력회사는 관리의 대상이 아니다. 이들 관계는 부부와 같아 공동의 부가가치라는 '자식'을 낳아 기르는 전략적 파트너다. 대기업이 '갑'이고, 협력회사는 '을'이었던 시절은 갔다. 이젠 모두 '갑'이다.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